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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쟁 Oct 01. 2019

무슨 일 하세요?

하비슈머이자 잡노마드인 어느 프리랜서 이야기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한 가지 일만 하는 사람은 없다


남편 친구의 결혼식에 같이 갔다. 그날 모인 남편의 친구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란 사이로,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모여 놀 만큼 절친하다. 거기에 총 세 명이 짝꿍으로 자리에 함께했다. 나를 포함해 둘은 결혼한 사이, 한 명은 사귀는 사이. 처음 단체모임에 참석한 짝꿍 3에게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졌다.


이십 대 땐 데이트 겸 가벼운 맘으로 연인의 결혼식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삼십 대가 되면 그런 자리에 선뜻 참석하기 어려운 법이다. 결혼을 당장 앞둔 상황이면 몰라도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서 괜히 멋쩍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짝꿍 3도 아침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충분히 이해 가는 마음. 그래서 다들 말도 더 걸어주고 짓궂게 장난도 치며 그녀의 용기에 보답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다 같이 카페로 자릴 옮겼다. 열 명이라 한쪽 구석에 마련된 단체석에 자리를 잡았다. 공간이 다른 테이블들과 분리되어 있어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단체사진을 찍는다며 남자들은 밖으로 나갔다. 몇 번 본 적 있던 짝꿍 2는 사진을 찍어주러 같이 나갔다. 짝꿍 1은 갑자기 적막한 단체석에 그날 처음 만난 짝꿍 3과 단 둘이 남아 있게 됐다.


"......."

"......."


이건 뭐 소개팅도 아니고. 침 넘어가는 소리뿐 아니라 숨 내쉬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단 둘이 앉아 있으려니 짝꿍 3이 느끼고 있을 어색함을 내가 나서서 풀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다 티가 나서 내가 공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 같지만.


'처음 만난 사람과는 대화를 어떻게 하는 거였지?'


해가 갈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적어진다. 내가 짝꿍 3에 대해 아는 건 피로연장에서 들은 이름과 나이뿐이었다. 나는 낯을 가리기도 하고 안 가리기도 하는데 그날은 뭔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피로연장에서부터도 거의 가만히 있었더니 갑자기 발랄해지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일도 하고 간 터라 피곤하기도 했고.


불쑥 물었다.


"어디 사세요?"


아, 무난했다. 이 정도면 자연스러웠다. 짝꿍 3은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마침 살고 있었고 반갑다며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감도는 침묵. 웃으며 잘 이야기했지만 대화가 더 이어지진 않았다. 애꿎은 커피만 빨대로 휘휘 저으며 다음 이야깃거리를 고민했다. 여기서 자연스러우려면 30초 내에 다른 질문을 꺼내야 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무례할 여지가 있거나 아무 의미 없는 질문만 떠올랐다.


"무슨 일 하세요?"


내가 말을 꺼내며 짝꿍 3의 눈을 바라본 순간, 그녀의 입술도 뭐라 움직이는 중이었다. 우리는 서로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상대가 취준생이었다면 이 질문 또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얼핏 들은 것 같아 걱정을 눌렀다.


"디자인도 하고, SNS 관리도 하고, 뭐도 하고 그래요."

(=디자이너로 들어갔지만 디자이너의 일만 하는 건 아니라서 한마디로 디자이너라고 하기 좀 뭐해요.)


정확한 복기는 아니지만 그녀가 답한 요지는 디자인만 딱 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실상이 이렇다. 짝꿍 3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회사의 직원이라는 명목 하에 '디자인' 외에 다른 업무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회사 업무가 그렇다.


이전의 내 경험을 떠올려 봐도 비슷하다. 어느 공공기관에서 근무할 때 나는 '교사 연수'를 진행하면서 '디지털 사진첩'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실물로는 처음 본 플로터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대형 포스터 이미지를 출력'하는 일도 맡았다.


회사 내에서든 밖에서든, 사람들은 한 가지 일만 하지 않는다.



하비슈머(hobbysumer)와 잡노마드(jobnomad) 사이


이제 짝꿍 3에게 갔던 질문이 내게 돌아올 차례였다. 고민했다. 어떻게 답할지 생각해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답할지 정해야 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슨 일 하느냐, 직업이 뭐냐, 이런 종류의 질문에 내가 쉽게 답하기 곤란한 이유는 하나의 명사로 일의 실체를 규정하기 어려워서다. 회사에 출퇴근하고 있지 않으니 이제 '직장인'은 아니다. 일종의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는데 프리랜서도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요즘 주목받는 용어로 설명하자면 난 '하비슈머(hobbysumer)'와 '잡노마드(jobnomad)'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그렇다. 취미와 일의 경계가 모호하고 여러 업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 


▶ 하비슈머 (hobbysumer = hobby + consumer)

퇴근 후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 드로잉, 악기 등 다양한 방면의 취미활동을 위해 소비하고, 이를 즐기면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을 뜻한다.  


▶ 잡노마드(jobnomad = job + nomad) 족
               
직장과 직종에 목메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능력에 따라 직장, 직종, 지역 등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람.


출처: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가치관에 따라 누군가는 내가 일이라고 주장하는 활동들을 취미로 한정 짓기도 한다. 어디까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에 해당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서 누가 무슨 일 하느냐 물으면, 질문의 의도와 질문자와의 관계에 따라 답을 달리 하는 편이다. 요즘은 그냥 편의상 국어 과외를 한다고만 말한다. 가치관을 깊게 파고들지 않아도 되고, 비교적 간단히 설명하기 좋아서.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완성한 답안이다.


[ 그간의 실험 결과 ]

"무슨 일 하세요?"

▷ 답안 1. 국어 과외 하고 있어요.
반응 1
- 내 전공을 아는 어른: ?? (진심을 담아 안타까운 듯) 전공이 아깝다. (=요즘 취업이 힘들지..)
- 나: 사실 그것도 하고 있어요. 글도 써요. (취업 준비 한 적이 없..)
- 내 전공을 아는 어른: 음....

반응 2
- 아는 어른: 시간 많겠네~ 잠깐잠깐만 하면 되고.  
- 나: 매일 공부해야 돼요. 하루에 8시간 이상 일해요. 공부하고 이동하고 가르치고 하면요. (+저녁 없는 삶이라고 들어보셨죠?)

반응 3
- 건너 건너 아는 사람: 돈 많이 벌겠다~
- 나: ^^...... (할많하않)


▷ 답안 2. 학생들 국어 가르치고 있어요.
반응 4
- 건너 건너 아는 어른: 어머 학교 선생님?!
- 나: 아뇨 과외요. 사교육.
- 건너 건너 아는 어른: 아........... (할많하않)
- 반응 2, 3 반복


▷ 답안 3. 과외도 하고 영상도 만들고 글도 써요.
반응 5
- 오랜만에 만난 친구: 무슨 과외? 무슨 영상? 무슨 글?
- 나: (구구절절) 국어 가르치고, 친구들이랑 유튜브 채널 하나 운영하고 있고, 가끔 홍보영상도 만들고... 글은 드라마 극본 준비 중인데 당선된 건 없고 소설도 쓰고 있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아 ^^;;....

반응 6
- 누군가: 유튜브? 소설? 그건 취미 아닌가?
- 나: 아........... (와씨 나 취미 부자)



프리랜서의 정체는 까다롭다


일에는 보통 그에 맞는 적절한 명칭이 다 있기 마련이다. 디자이너, 작가, 교사, 회사원, 감독 등등. 그래서 사회에서 말하는 '일' 혹은 '직업'은 주로 명사로 설명을 하게 된다. 그런데 따져보면 일이란 건 다 동사에서 출발했다. 디자인을 하니까 디자이너고, 글을 쓰니까 작가다. 학생들을 가르치니까 교사고, 회사에서 담당 직무를 하니까 회사원이고, 영화를 감독하니까 감독이다. 


내 상황은 나의 단편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많다. 내 역할이 필요한 어느 순간에 나는 '일도 많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야속한 사람'이 되곤 하니까. 프리랜서에 관한 뿌리 깊은 오해 중 하나가 '시간이 많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속 터진다 정말. 그래서 내가 일을 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들고 얼마나 노력이 필요한지 구구절절한 설명을 해보기도 했다. 남편과 엄마를 붙잡고 말하면 둘은 끄덕끄덕 하면서도 약간 한 귀로 흘린다. 쟤 또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내가 모를 줄 알았지!) 


그래서 나의 일도 동사를 기반으로 해서 적절한 명사랑 연결해 보았다. 간단히 설명해 보자.


▶ 일: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 직업: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국어 과외 선생

돈을 버는 게 일이라고 한다면, 나는 국어 과외를 하는 선생이다. 적절한 대가를 받고 있고 특정 장소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몸도 쓰고 머리도 쓴다. 생계유지라는 목적도 분명하다. 적성도 얼추 맞다. 어느 순간부터는 계속하여 종사하고 있기도 하다. 


창작자

꼭 적절한 대가가 돈이란 법은 없다. 반응이나 성취감도 내가 적절한 대가로 느낀다면 그 또한 일의 대가인 법이다. (여기에서 열정 페이는 제외한다. 열정 페이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 고용주나 사회가 권하는 열정 페이는 쓰레기다.) 그래서 내가 일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임하는 활동이 일일 수 있다면, 나는 영상 제작도 하고 글도 쓰는 창작자다. 간혹 돈을 대가로 받기도 하고.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이고, 몸과 머리를 무지하게 쓴다. 이 또한 적성에는 잘 맞다. 


주부

여건에 따라 생기는 일 또한 일이니, 결혼한 나는 주부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 집안일은 필수라 생계를 유지하는 목적에도 부합한다. 적성에 맞지는 않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종사해야 할 일이다.


만약,

집안일이 노동만 있고 금전적 대가가 없어 일이 아닌 게 된다면, 나는 주부가 아니게 된다. 어떤 활동의 대가로 돈을 벌지 못한다고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은) 작가가 아니다. 돈을 고정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 벌어야만 알바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영상 크리에이터가 아니다. 4대 보험을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면 나는 이제 과외 선생도 아니다. 


정리를 해도 프리랜서의 정체는 까다롭다.






짝꿍 3에게 직업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던 건, 정말 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건지, 살아온 궤적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갑자기 하게 된 건지, 필요하다 생각해서 준비해 마련한 일자리인지, 그렇게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궁금한 것이었다. 요즘은 나처럼 투잡 쓰리잡이 허다하고 기존에 없던 종류의 일을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긴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짝꿍 3과는 일 얘기로 몇 마디가 더 오갔다. 대화를 끌어가는 내 스킬이 탁월했다면 더 많은 얘길 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의 입술은 달싹거림만 남기고 금세 닫혔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긴 침묵을 택했다.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으니 갑자기 소울메이트가 되어 수다판을 벌였다면 그게 더 이상하긴 했을 거다. 


만약 다음에 만나서 그녀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답할 생각이다.


"김수쟁씨, 무슨 일 하세요?"

"지금은 국어를 가르치고,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집안일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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