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비행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어릴 때 비행기를 여러 번 타보긴 했지만 너무 어릴 때라 내 기억에는 없다. 선명한 기억으로는 고등학생 때가 처음이다.
그 시절의 수학여행은 경주나 부여로 가는 게 당연했다. 혹은 설악산. 당시엔 딱히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 그냥 긴 체험학습 정도의 느낌. 그러다 우리 학년 때부터 수학여행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주도가 후보로 떠오른 것이었다.
가정통신문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설악산과 제주도. 그중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단연 제주도였다. 그렇게 2003년 9월, 우린 김포공항에 모였다.
세상에, 이렇게 진짜 제주도를 간다고?!
"우어어어어~!!!"
비행기가 출발하면서 함께 터져 나온 탄성이 우리 스스로도 웃겨서 다 같이 웃었다. 친구들도 대부분은 비행기를 그때 처음 타봤다. 난 낯선 흔들림이 재밌으면서도 살짝 무서웠다.
떴다, 떴다, 비행기! 간다, 간다, 제주도!
비행기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의자에 등이 딱 붙으면서 어마어마한 비행기의 속력이 그대로 등받이까지 전해졌다. 서서히 공중에 떠오르는 게 요상하고도 설렜다. 이 육중한 것이 어쩜 이렇게 사뿐 오를까.
친구들과 첫 비행기를 공유하는 순간, 하늘은 내 발아래에 있었다.
첫 번째 공포의 기억: 이마에서 가스가 돌아다니다
비행은 곧 여행의 시작이다. 난 성인이 되고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국내 여행지는 물론 가까운 해외 지역도 즐겨 다녔다. 비행시간 자체가 짧아부담이 적은 곳들로 해마다 떠났다. 공항까지 가는 게 일이었지, 일단 비행기를 타면 그때부터는 신났다.
2013년 4월, 일본 나고야에 가던 날이었다. 특가로 나온 표를 운 좋게 구해서 갑자기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떠나기 며칠 전 코감기에 걸려버렸다. 그냥 둬도 며칠이면 낫겠지만 여행 중에 아픈 건 꽤 곤란하다. 목도 부어서 약을 먹고 비행기에 올랐다. 날개 바로 옆자리인 줄은 타고 나서야 알았다. 엔진 소리가 꽤 시끄러웠고 날개에 바깥 풍경이 좀 가려졌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자리는 어떻게든 하늘을 내려다볼 수 있는 창문 옆이면 됐다.
늘 창가에 앉던 난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겁에 질려버렸다. 머리와 귀가 너어어어무 아팠다. 높은 산에 오를 때처럼 희미하게 멍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팽팽해진 고막을 인위적으로 더 늘려대는 느낌이었다. 침을 연신 삼켜봐도 해결되지 않았고 고막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그것도 이미 당황스러웠는데, 이마의 표피 아래에 가스가 마구마구 돌아다니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 가스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내 피부에 작은 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 살갗을 뜯어내고 푸슈슈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느낌에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인지 감도 잡지 못했다.
일본 항공기여서 승무원들은 죄다 일본인이었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땐 그나마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할 수 있었는데 '내 이마 안에 가스가 돌아다녀요.'를 구사할 수준은 아니었다. 제스처로도 표현에 한계가 있을 것 같아 소심이는 그냥 견디기로 했다. 예정된 착륙 시간까지는 한 시간 가량이 남아 있었다.
급한 대로 옆자리에 앉은 엄마랑 자리를 바꾸고서야 조금 나아졌다. 나중에 증상을 토대로 알아보니, 귀가 아픈 것은 코감기에 걸렸을 때 더 심해지는 '항공성 중이염', 이마에 가스가 돌아다니는 느낌은 '항공성 부비강염'이었다. 날개 쪽이나 창가 쪽에 앉으면 증상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고. 그 뒤로는 비행기 창가 자리엔 절대 앉지 않는다. 그날처음으로 비행기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생겼다.
두 번째 공포의 기억: 난기류가 산소를 앗아가다
한동안 잠잠하던 비행기 공포는 또 다른 형태로 나를 찾아왔다.2015년 7월, 태국 방콕에서 잘 놀고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였다. 편도 6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 이륙 후 30분쯤 지났을까. 난기류를 한두 번 겪고부터 가슴이 답답해졌고 산소가 모자란 느낌이 온몸을 괴롭혔다.
숨을 크게 쉬어도 호흡이 편해지지 않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혹시 이런 게 과호흡일까 싶어 손으로 입을 막고 내쉰 숨을 다시 마셔보기도 했다. 피곤하긴 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아픈 구석은 없었는데도 그 증상은 착륙 때까지 계속됐다. 잠도 오지 않았다. 자세를 아무리 바꿔도 소용이 없었다. 아주 딱, 견딜 수 있는 한계치 끄트머리에서 더 나빠지지도 나아지지도 않은 상태가 이어졌다.
승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I can't breathe.'는 너무 심각한 표현인 것 같아서 넣어뒀다. 5시간 내내 그럴 줄 알았더라면 말해볼 걸, 나중에야 후회했다. (이놈의 소심이)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겪은 증상은 일종의 '비행기 공황장애'인 듯했다. 맙소사. 생각보다 심각하게 불안이 나를 잠식한 모양이었다. 이때부터 난기류에 대한 공포가 확실하게 생겼다.
세 번째 공포의 기억: 따뜻한 얼굴이 불안을 잠재우다
2016년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 때였다. 스페인에서 출발해 독일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한국에서 프랑스 파리까지의 첫 장거리 비행 때도 그럭저럭 괜찮아서 큰 걱정이 없었다. 친구들과 이십 대의 마지막을 유럽에서 멋지게 장식했단 생각에 두려움은 잊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두 시간 남짓의 비행을 하고 나면 독일 소시지가 눈 앞에 나타날 예정이었다! 그 사이에 뭐 별 일이야 있겠어.
하지만 별 일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난기류의 절정을 유럽의 하늘에서 맛보았다. 이륙 후 초반부터 꿀렁거리던 비행기는 어느 순간부터 아주, 매우, 엄청,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유낙하 느낌이 싫어서 놀이기구도 잘 안 타는데! 이건 마치 자이로드롭이 작동 중에 기기에 결함이 생겨 렉 걸린 컴퓨터처럼 꺼걱꺼걱 하강과 상승을 해대는 꼴이었다. 당장 몇 초 후에 추락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흔들림이 지속됐다.
특별한 공포감이 있는 나뿐만 아니라 난기류에 무딘 편인 친구들까지도 떨게 만들 정도로 심한 이상기류였다. 안내방송도 계속해서 나왔다. 승객들은 모두 벨트를 매고 앉았다. 갑자기 안내방송 속 영어가 잘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승객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버텼다. 오른쪽 앞자리에 앉은 한국인 언니는 앞좌석에 머리를 대고 견디고 있었다. 바로 뒷자리에서 시끄럽게 낄낄대던 외국인 남자들도 조용해졌다. 나는 손잡이를 꽉 잡고 의자에 몸을 밀착해 정자세로 앉았다. 만약에 추락해도 내 손은 손잡이를 놓지 않으리라..! 혹시 중요한 순간에 미끄러질지 모르니까 손에 난 땀도 주기적으로 닦아줬다.
저 멀리 대각선 앞쪽에서는 승무원을 부르는 다급한 상황이 이어졌다. 힐끔 보니 어떤 머리 하얀 외국인 할머니가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돌아가면서 머리 하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눴고,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참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착륙까지 남은 시간의 한 허리를 베어낼 수만 있다면 댕강댕강 잘라서 우주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앞으로는 정말 착하게 살겠다고 맹세했다. 흔한 다짐이지만, 흔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그러나 더 이상의 마인드 컨트롤은 이미 내 능력 밖의 일. 난 그때부터 차라리 기절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익숙하지 않은 멘트가 들려왔다. 혹시 기내에 의사나 간호사가 있는지를 묻는 안내방송. 무언가 사달이 난 게 분명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머리 하얀 할머니의 일인 것 같았다. 승무원들이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 하얀 할머니 주변을 서성였다.
그때, 내 바로 앞자리에서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누군가 일어섰다.
I'm a Doctor.
의사가 등장했다. 심지어 한국인이었다.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머리 하얀 외국인 할머니에게 다가간 그는 갖고 있던 상비약으로 간단히 처방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따뜻한 얼굴로 할머니를 달래주었다. 그 의사분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아주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머리 하얀 할머니도 의사의 말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멀어서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어떤 마음이 오갔는지는 분명하게 보였다. 의사분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신기한 건, 그 모습을 보며 나의 불안도 조금씩 가셔 가고 있었다는 거였다. 마치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의 비행을 세 번이나 겪은 뒤로 몇 번 더 장거리 여행을 했다. 다행히 더 이상은 비행기에서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됐다. 난기류를 만나도 전보다는 좀 낫다. '비행=공포'의 공식이 다시 '비행=여행의 시작'이라는 공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건 다 비행기에서 만난 한국인 의사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비행기도 같았는지 환승하러 가는 길에 의사 선생님의 뒷모습을 계속 볼 수 있었다. 아이돌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힐끔거리며 걸었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착륙 전에 정신을 잃었을 테고, 그 기억 때문에 다시는 비행기를 못 탔을 것이다.
그분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거다. 대신 그날의 고마움을 다른 누군가에게 갚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