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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쟁 Oct 30. 2019

온라인 탑골공원이 뜬 이유

세 가지 스토리텔링

이건 마치 프링글스. 한 번 열면 멈출 수가 없다. <온라인 탑골공원> 얘기다. 채널명을 듣자마자 깔깔거렸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노랠 듣다 보니 신기하게도 아는 노래 다음 아는 노래, 아는 가수 다음 아는 가수가 나왔다. 무의식 중에 흥얼거리다가 나도 어느새 거기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왜지?






채널명으로 스토리텔링: 잘 지은 이름 하나, 열 콘텐츠 안 부럽다


<온라인 탑골공원>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의 <SBS 인기가요>를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유튜브 채널이다. 이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공원인 종로 탑골공원이 연상된다. 탑골공원은 1920년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한 뒤 1992년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탑골공원을 대하는 마음은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역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원 가운데에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장소인 팔각정도 그대로 남아있다. 탑골공원은 1900년대 서울의 역사와 그 역사를 직접 겪어온 사람들이 공존하는 쉼터이다. 항상 어르신들이 모여 계신다고 해서 언젠가부터 노인들만의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는데, 그곳이 젊은이들의 방문을 꺼리지는 않는다. 


<온라인 탑골공원>은 이 속성을 닮았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즉 K-POP의 태동기부터 부흥기까지의 역사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가요의 주 소비층이었던 세대가 지금은 최소 30대 이상이다. 그 시절을 직접 겪은 으르신들이 향수에 젖어 모이는 곳이 바로 '온라인 탑골공원'. 이곳 역시 젊은이들의 방문을 반긴다.


채널명 그 자체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근래에 이보다 잘 지은 이름을 보지 못했다. 만약 채널명이 '1990년대 인기가요 몰아보기' 혹은 '1990년대 가요 모음집' 정도였다면 지금 인기의 절반밖에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름 하나만 잘 지어도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가사의 스토리텔링: 탑골 가요에는 구체적인 경험담이 있다


가사를 쓸 때 실제 경험담을 소재로 삼는 아티스트가 많다. 직접 겪었던 일을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로 다듬으면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련된 방식이다. 탑골 가요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조금 다른 점을 찾자면, 경험담을 쓰긴 하는데 아주 구체적인 에피소드라는 것이다. 조금 더 투박한 날것의 느낌.



1. 김건모 <잘못된 만남(1995)>
 : 연인과 친한 친구를 믿어서 서로 소개해주고 같이 어울려 지냈더니 그 둘이 결국 바람피운 이야기 

그 어느 날 너와 내가 심하게 다툰 그날 이후로
너와 내 친구는 연락도 없고 날 피하는 것 같아
그제야 난 느낀 거야 모든 것이 잘못돼 있는 걸
너와 내 친구는 어느새 다정한 연인이 돼 있었지    


2. 솔리드 <천생연분(1996)> 
: 여자 친구가 있지만 친구가 하도 권하기에 딱 한 번만 소개팅을 하기로 하고 설레는 맘으로 나갔더니 여자 친구가 소개팅녀로 나와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우린 천생연분이라고 서로 이번만 용서하자는 이야기

혹시나 하고 주위를 살피고 흐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어
드디어 내 친구의 모습 보이고 난 수줍어 고개를 숙였어
국민학교 동창이란 친구 얘기에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드니
내 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너 황당한 나보다 더 당황하는 너     
                         

3. 비비 <하늘땅 별땅(1997)>
: 좋아하는 남자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어렵게 하나씩 다 바꾸고 찾아갔지만 그에게 이미 여자 친구가 생겨서 슬픈데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

네가 마른 여잘 좋아한다 해서
힘든 다이어트 참아왔는데
네가 긴 생머리를 좋아한다고 해서
여태껏 길러왔는데
네가 남자 많은 여잔 싫다 해서
누가 말 붙여도 외면했는데
네가 잘 노는 여잘 싫어한다고 해서
그 좋은 나이트도 안 가  
   
       
4. 한스밴드 <오락실(1998)>
: 시험을 망쳐서 집에 가기 싫어 오락실에 갔는데 회사에 있어야 할 아빠를 만나 게임 대결을 했다는 귀여운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IMF 외환위기로 실직한 그 시대 가장들의 씁쓸한 애환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이야기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5. god <어머님께(1999)>
: 가난했던 유년 시절 철없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이야기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 먹었던 라면      
     


가사가 수필 한 편 같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은데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서사가 있어 정겹다. 직설적이고 발칙하면서도 때론 소박하고 감동이 있다.



채팅창에서 스토리텔링: 뉴트로(Newtro)로 다른 세대를 만나다


<온라인 탑골공원>은 '뉴트로(Newtro: New+Retro)' 노선을 제대로 탔다. 유튜브라는 21세기 매체에서 20세기 가요계의 르네상스기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고도 복고적이다. 시청자들은 실시간 채팅창에서 끝도 없이 옛날 얘기를 한다. 보고 듣다가 웃고 공감한다. 채팅창이 재밌어서 방송을 끌 수가 없다는 사람도 많다. 옛날 방송을 같이 시청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시청자들도 또 다른 스토리텔러가 되는 것이다. 


실시간 채팅창에서 '탑골 청하(=백지영)'도 '탑골 레이디 가가(=이정현)'도 탄생했다. 발라드 가수로 유명한 백지영은 격렬하고 섹시한 춤을 소화하는 댄스 가수였다. 영화배우로 입지를 다진 이정현도 시대를 앞서간 테크노 여전사였다.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점은 큰 흥미요소로 작용한다. 20년 차 베테랑들도 신인 때는 다 발랄하고 상큼했으니까. 그 외에도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소환된 많은 가수들은 방송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온라인 탑골공원>에는 K-POP의 초석을 다진 아이돌계의 으르신들도 다 모여 계신다. 아이돌 조상님들은 일찍이 잘못된 사회에 경고를 날렸고 인생을 고찰했으며 사랑에 가슴 아파했다. 팬들은 속절없이 빠져들었고 '누군가의 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했다. 이때부터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비롯해 H.O.T., 젝스키스, 베이비복스, S.E.S., 신화, 핑클, god, 클릭비의 무대가 특히 반갑다. 요즘처럼 철저한 훈련을 받으며 탄생한 그룹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금 무딘 칼을 닮은 군무, 살 보일 틈 없는 콘셉트 의상, 짙은 색 머리카락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좋아했던 그룹의 노래가 나오면 채팅창에는 그들을 따라다녔던 소싯적 이야기가 쏟아진다. 서로의 가장 푸르고 봄 같았던 시절을 함께했다는 연대감은 그 무엇과도 대체하기 힘들다.


<온라인 탑골공원>은 방송도 인기 역주행이 가능하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 콘텐츠 분야는 새로운 것이 늘 절실한데 재탕이 통해버렸다. 재가공 없이 예전 자료를 그대로 내보내기만 해서 오히려 인기가 더 폭발했다. CG나 자막으로 요즘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첨가되었다면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톱스타 배우들이 MC 역할을 하는 모습, 탑골 가수들의 데뷔 무대, 360도로 돌아가는 카메라, 고딕과 명조 계열로 쓴 단색 자막, 4:3의 화면비율 등. 이 모든 게 지금의 10대나 20대에겐 신선함을, 30대 이상에겐 익숙함을 선사한다. 옛것 그대로인 방송을 통해 누군가는 요즘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그 시절을 반추해본다. 그렇게 다른 세대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장이 바로 <온라인 탑골공원>이다.






<온라인 탑골공원>은 누구나 언제든 들어와 쉬다 갈 수 있는 온라인 공원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추억에 감성을 얹은 <온라인 탑골공원>의 스토리에는 엔딩이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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