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쯤 산 문집> Outro
잘 아는 초딩이 말했다. 겨울보다 여름이 좋다고.
그 말을 들으며 이 아이가 기억하는 여름은 몇 번일지 궁금해졌다. 많아야 열세 번, 끽해야 열 번 이내겠지. 귀여워서 쿡쿡 웃다가 문뜩 생각의 방향이 나를 향했다.
그럼 내가 기억하는 여름은 몇 도막일까.
기억을 더듬어 봤다. 웃음이 잔잔해졌다.
내가 아는 여름도 서른 번이 채 되지 않았다.
이것 참 머쓱하군.
세월은 당긴다고 당겨지지 않았고, 밀어낸다고 밀리지 않았다.
그냥, 차곡차곡 쌓여 흘렀다.
난 피터팬이 아니었다. 나이 먹는 게 좋았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은 늘 아는 게 많았고 해 본 게 많았다. 나도 빨리 어른이 돼서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모자란 걸 조금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보다 많은 세월은 무엇으로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삼십 대에 들어서니 마냥 어리지만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좋았다. 시간을 가진 기분이었고, 뛸 방향을 알고 갈 수 있게 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이쯤 되니 나보다 어린 사람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들의 새로운 생각과 태도는 이전과는 다른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갖지 않은, 내가 가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젠 나에게 없는 걸 아쉬워 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 이상은 <삶은 여행> -
나를 늘 부족한 존재로 여겼던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준 노래였다. 위 대목을 접한 순간 정말 멍해졌었다. 나는 왜 그렇게 나에게 없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그제야 내가 쌓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에게는 나의 결이 있다.
서른 두어 번의 여름을 산 나는
이전보다 살이 좀 쪘고
머리숱이 줄었고
여전히 노래 듣기를, 부르기를 좋아하고
여전히 무시하는 것을 싫어하고
갖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에 감사하고
아래층의 흡연에 분노하고
나빠지는 것보다 나아지는 것이 기쁘고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슬프고
이별인 줄 알았던 하루하루가 새롭고
혼자 먹는 밥이 익숙하고
수다가 신나고
교통체증이 지루하고
깻잎을 좋아하게 됐고
샐러리는 더 싫어하게 됐고
헤어졌던 이들과 다시 만났고
어울리던 이들과 헤어졌고
아빠를 보냈고
남편을 만났고
11월이면 가장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고
7월이면 긴 원피스를 꺼내 입고
즉석밥을 자주 먹게 됐고
술은 거의 안 마시게 됐고
운전을 하게 됐고
걷기를 덜 하게 됐고
국어를, 특히 문법을 사랑하고
god를, 특별히 오래도록 아끼고
멈췄던 생각을 다시 적어 내려가고
넘치던 생각은 조금씩 정리해가고
탄산수를 즐기고
놀이기구를 못 즐기고
오작동하는 화재경보기에도 매번 뛰어 나가고
다리 위에서 조금만 흔들려도 굳어 버리고
말장난 유머에 깔깔대고
남의 결혼식에서 꼭 울컥하고
칭찬은 밖으로 꺼내고
욕은 안에서 뱉지 않고
만성 피부병을 얻었고
결혼반지를 잃었고
대나무를 어깨 바로 아래까지 키워냈고
작업실의 바퀴벌레를 박멸했고
따릉이를 좋아하고
억압을 싫어하고
미드를 보기 시작했고
TV 프로그램을 잘 안 보기 시작했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 존재하고
최고란 말을 들어봤고
거짓말을 해봤고
거짓말을 이해하게 됐고
다시 작업실을 꿈꾸고
진작 취직은 접었고
카톡은 무음이고
전화는 진동이고
옛일들이 희미해졌고
취향은 선명해졌고
사랑니는 4개나 났고
그중에 1개는 뺐고
뒤통수를 당해봤고
용서를 해봤고
길치에 방향치고
작가에 편집자고
타이핑은 빠르고
포기는 느리고
늦잠을 잔 적은 별로 없고
뒤끝은 좀 있고
귀여운 것에 껌뻑 죽고
가여운 것에 눈길을 주고
깜짝 잘 놀라고
살짝 엉뚱하고
사색을 알고
진리는 모르고
글을 쓰고
밥을 짓고
영상을 만들고
공부를 하고
울고
웃는다.
인생 뭐 별 거 없다. 몇 번의 여름을 기억하든, 그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