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의 노래 중 <습관>이라는 곡이 있다. 이별 후에도 연인을 잊지 못해서 매일 사진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다소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습관은 누구나 한 가지쯤 지니고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머리는 잊어도 몸이 기억하는 그런 것들. 내게도 그런 것들이 있다. 다행히 사진에 말 거는 그런 종류는 아니다.
습관의 서막
또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생이 되니 내 맘대로 시간표를 짤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았다. 하고 싶은 공부만 골라서 해도 되는 점이 두 번째로 좋았다. 그것은 곧 수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경영학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기였는데 고민 없이 난 원하던 언론영상학부에 진학했다. 수능에 질려 있던 터라 대학교 강의가 세상 좋았다. 전공이고 교양이고 가릴 것 없이 관심 있는 수업 고르는 재미에 수강신청도 너무 즐거웠다. 강의시간표 소책자를 받으면 무슨 과목이 개설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했다.
전공필수는 당연히 듣는 거였지만 전공선택에서는 약간의 한계가 있었다. 학년 별 권장 과목이 따로 있다는 것. 융통성이 지금의 절반밖에 없던 당시로서는 2, 3학년 수업에 도전할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순서대로 처음부터 하는 걸 좋아해 정해진 커리큘럼을 충실히 따랐다. 1학년 때는 1학년 강의만 신청했다.
첫 학기엔 이론 수업 1개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1학년을 위해 마련된 전공선택 과목이 없었다. 전필 대형 강의 한 개에 나머지는 다 교양 수업으로 시간표를 채워야 했다. 각 수업이 나름대로 좋기는 했지만 영 전공을 전공하는 맛이 안 났다. 게다가 전필 이론이 사회학에 가까운 내용이라 수업이 진행될수록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뭔가 빨리 전문가가 되고 싶고 많이 알아가고 싶을 때여서 실습수업에 대한 로망만 커져갔다. 2학기가 되어서는 전공선택 두 과목을 수강할 수 있었으나 이 역시 '~의 이해'로, 이론 과목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영상 제작'이었다.
습관의 종말: Shift + Del
대망의 2학년이 되었다. 드디어 실습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설레는 맘으로 수강했던 첫 과목은 <영상언어실습>. 이름에서부터 실전 수업 같고 멋졌다. 편집실에도 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거운 프리미어, 수십 명이 같이 사용하는 델 컴퓨터, 거기에 초보 영상 편집자까지 더해지면? 렉 걸리기 딱 좋은 환경이 완성된다. 편집실의 컴퓨터는 최고 사양임에도 고장이 잦았고 USB 포트는 바이러스의 온상이었다. 여기에 꽂았던 내 외장하드는 몇 번이나, 소중한 작업물들을 데리고 저 세상으로 갔다. 편집은 고통이자 즐거움이었다.
요즘엔 프로그램도 다양해졌고 휴대폰 어플로도 쉽게 영상편집이 가능하다. 덕분에 유튜브 시장도 클 수 있었다. 지금이야 영상제작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2008년 당시만 해도 완전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기 전이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 촬영은 비디오테이프로, 편집은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했다.
편집을 하려면, 6mm 캠코더로 촬영한 비디오 영상을 '데크'라는 기기에 넣어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는 작업이 먼저 필요했다. 데크 기계 없이는 편집 불가능. 그걸 학생 개인이 사기엔 비싸서 데크 완비인 편집실은 아주 희소한 공간이었다. 자리 예약 경쟁도 치열했다. 개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고, 제작 수업을 듣는 학생에 한해 기획안을 제출해 선정되어야만 편집실을 쓸 수 있었다. 같은 컴퓨터에서 두 팀이 비슷한 시기에 작업하기라도 하면 시간이 겹쳐 아주 골치 아팠다. 그렇다 보니 편집실 사용 허가가 나면 때론 권력(?)을 쥔 느낌마저 들었다. 한참 후에 알게 됐는데, 타 학교에 비해 우리 학교의 편집실 여건이 그나마 좋은 편이었다.
캡쳐(Capture)
테이프 속 화면을 디지털 파일인 '클립'으로 변환하는 걸 <캡쳐>라고 한다. 데크에 6mm 비디오테이프를 넣어 그대로 재생시키는 일이다. 실제 촬영 시간이랑 똑같이 재생이 된다. 2배속 이런 거 없다. 1시간 찍었으면 1시간 캡쳐를 해야 했다. 여기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캡쳐를 걸어두고 밥을 먹고 오곤 했다. 요즘은 보통 DSLR로 촬영하니까 SD카드에 저장된 디지털 파일을 저장 장치로 드래그&드롭만 하면 된다. 얼마나 세상이 좋아졌는지. 나 때는 말이야~
가편집 or 러프 편집(Rough Cut Editing) (+ 본 편집)
그렇게 편집의 'ㅍ'이 완성되면 한 시간짜리 클립으로 <가편집(러프 편집)>을 해야 한다. 쓸 것과 버릴 것으로 나눠 작업대인 '타임라인'에 댕강댕강 큰 흐름을 잡아 배치하는 일이다. 캡쳐를 할 때 애초에 장면 단위로 클립을 쪼개는 기능을 활용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 기능 체크 여부에 따라 작업 시간은 2시간쯤 줄어들 수도 늘어날 수도 있다. 한번은 '장면 단위로 나누기'에 체크하지 않고 캡쳐했다가 클립 자르기만 종일 한 적도 있다. 그럴 땐 그냥 다시 캡쳐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예쁘게 나뉜 클립들 중 버릴 것과 쓸 만한 것을 구분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쓰기엔 별로고 버리기엔 아까운 계륵 촬영본을 만났을 때! 애매한 것은 따로 남겨둬야 한다. 망설임 없이 지운 클립은 나중에 꼭 필요해진다.
이제 편집의 '펴' 정도 진행이 되었으니 타임라인에 올려 마음껏 영과 혼을 불어넣으면 된다. 자료도 활용하고 자막도 넣고 음악도 넣어 보고 효과도 넣어 보고 화면 보정도 해 보고... 가편집은 본 편집 과정까지 합쳐서 최종 단계 직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 될 때도 있다.
그렇게 뚝딱뚝딱 계획대로 편집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컴퓨터를 끼고 살았고, 또래 여자들 중 나름 컴퓨터에 관해 잘 아는 편이었다. 웬만한 소프트웨어도 조금 써 보면 얼추 파악하는 정도였다. 단축키도 곧잘 사용해서 파일을 지울 때도 [ Shift + Del ]을 사용했다. 휴지통을 거치지 않고 한번에 파일을 컴퓨터에서 싹 지우는 방법이다. 어차피 버릴 것을 뭣하러 두 번 일하나 싶은 마음에. 이것은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나의 익숙한 습관이었고, 그것이 발단이었다.
어느 정도 편집을 해 두니 그날따라 갑자기 하드 용량 정리를 하고 싶었다. 프로젝트 저장을 해 놓고 잠깐 컴퓨터가 쉬는 동안, 난 사용한 것들 위주로 캡쳐했던 '파일'들을 지웠다. 당연히 단축키 [ Shift + Del ]을 눌러서.
Media Offline
멋모르고 가뿐한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다시 켰다. 다채롭게 이어져 있던 타임라인 속 클립들은 'Media Offline'이라는 글자를 띄웠다. 잠깐 오류가 났거나 다운된 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이게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Offline'라는 단어가 그렇게 공포스러운 단어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타임라인에 올린 편집용 영상은 '클립'이다.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는 원본 영상은 '파일'이다. 클립은 파일을 불러와서(Import) 편집하는 용도고, 이것들을 하나로 통합해서 출력(Export)을 하면 최종 영상이 새롭게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지운 것은 '파일'이었다.
난 작업 중인 원본을 지웠다.
타임라인과 함께 내 머릿속도 OFFLINE 상태가 되었다. 몇 시간 동안 편집한 것이 싹 날아간 것이었다. 캡쳐부터 다시 해야 했다. 테이프 돌리고, 러프 편집을 하고..
나는 편집을 도맡아 한 고마운 팀원에서 대역죄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시 매우 착했던 팀원들이 괜찮다고 다시 하면 된다 했지만 내가 괜찮지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캡쳐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뒤로 [ Shift + Del ]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습관의 기원: Ctrl + S
꿈꾸며 사는 거야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니까 눈치 보며 살지 마 떳떳하게 Do it Yourself
종합편집
최종 편집이자 모든 요소를 다 점검하는 단계인 <종합편집>을 마지막으로 영상편집은 끝난다. 영상언어실습에서 만들던 (날려 먹었던) 첫 영상은 뮤직비디오였다. 우리 팀은 레이지본의 <Do it Yourself>를 골랐다. 가사 속 메시지도 좋았지만 레이지본 특유의 발랄한 리듬이 좋아서 내가 적극적으로 밀었다. (다시 생각해도 팀원들이 착했다.) 촬영도 편집도 초보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 능력치를 발휘했다. 즉, 기초와 이론에 충실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저건 절대 하지 마라 머릿속에 맴돌아 맴돌아 귓가에 맴돌아 워어어 이젠 날 냅둬라 워어어
· 이거 해라, 저거 해라 >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킴 · 저건 절대 하지 마라 > 손으로 X자 · 머릿속에 맴돌아 맴돌아 > 머리를 클로즈업해서 카메라 빙빙 돌림 · 귓가에 맴돌아 워어어 > 귀를 클로즈업해서 카메라 빙빙 돌림 · 이젠 날 냅둬라 워어어 > 아빠(팀원 1)를 뿌리치고 뒤돌아 서는 아들(친구 1)
참 눈치 안 보고 꿈꾸면서 만들었다 싶다. 이보다 더 일차원적일 수가 없다. 저런 영상일지언정(!) 편집하다 보면 조금만 건드려도 몇 시간이 훅 지나가 버린다. 초보 때는 얼마나 더했겠는가. 한 장면 다듬는 데 한 시간씩 걸렸다. 저 뮤직비디오를 만들 때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려고 클립도 이리저리 옮겨 보고, 효과도 이것저것 넣어 보고 하느라. 낯선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도 어려웠고, 언제 사고가 또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감도 견뎌야 했다. 전적(?)도 있고 해서 고 퀄리티의 종합편집은 아니었지만 차근차근 집중해서 마무리를 해 나갔다.
렌더링(Rendering) or 출력(Export)
막바지에 이르러 거의 완성을 앞두고 있을 무렵, 일종의 미리보기인 <렌더링>을 했다. 이건 약간 용어 차이가 있긴 하다. 보통 렌더링은 최종 작업물로 합치는 과정을 뜻하고 <출력>과 동일시된다. 프리미어에서는 타임라인에서 편집한 상태를 1차로 합쳐보는 과정을 렌더링이라고 부른다. 출력하면 어차피 거치는 과정인데 중간중간 해둬야 뒷 작업이 원활해진다. 출력은 컴퓨터의 CPU를 99% 가동하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렉이 걸리면 영상을 다시 뽑아야 한다. 미리미리 (프리미어에서 말하는) 렌더링을 해두면 나중에 출력을 할 때 CPU가 좀 고생을 덜 한다.
전체 흐름을 감상해 보려고 렌더링을 명령하는 엔터를 쳤다. 커서가 움직이다가 멈췄다. 점차 하얀 네모가 군데군데 보이고, 곧이어 제목 표시줄에 또 문구가 떴다. 이번엔 한글이었다.
(응답 없음)
.....!!!!!!!!! 사는 건 고해라 했던가. 편집하다 겪은 첫 다운의 기억은 전적 때문에 두 배로 강렬했다. 내 시간.... 내 클립.....!!!!!!! 내가 어디까지 저장을 했더라...? 나의 무의식아 힘내...!
오토세이브(AutoSave)
'오토세이브' 기능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그제야 알았다. 오토세이브는 자동 저장 기능이다. 5분이든 1분이든 설정해 놓으면, 내가 저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설정한 시간마다 프로젝트를 따로 저장해 준다. 편집이 점점 산으로 가서 타임 스톤을 쓰고 싶을 때도 유용하다. 왜 교수님께서 오토세이브부터 가르쳐주셨는지 몸소 체험했다. 이론으로 알아도 되는 걸 나는 참 굳이 겪어 깨닫는다. (...)
별 수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했다. 그래도 캡쳐부터 할 필욘 없는 거잖아...? 두 번째는 원래 더 잘하는 법(?)이다. 오토세이브는 컴퓨터 돌아가는 상태가 심상치 않으면 가장 먼저 꺼두는 기능이었으나, 사건 이후로 그 기능도 항상 켜 뒀다. 그나마 5분 전으로 돌리면 30분만 다시 편집하면 된다.
단축키는 영상편집에서도 큰 도움이 되는데, 내가 컷 편집을 빨리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확실히 시간이 절약되고 손에 익으면 머리보다 빠르게 손이 움직인다. 그때부터 생긴 습관이 [ Ctrl + S ] 무조건 누르기다. 문서 프로그램에서도 통용되는 '저장하기' 기능이다. 클립 한 번 자르고 [ Ctrl + S ], 자막 한 개 넣고 [ Ctrl + S ], 클립 불러오기를 해도 [ Ctrl + S ]를 눌렀다. 편집이 잘 안 풀려서 진행이 안 될 때면 더 자주 [ Ctrl + S ]를 누른다. 일종의 의식이 된 듯도 하다. 어쨌든 안 그래도 저장 강박이 있는 내게는 아주 맘에 드는 단축키. 덕분에 이제 작업하다 날리는 일이 없다.
번외: 습관의 후일담
처음은 애틋하다
내가 저장을 잘 해도 기계가 망가지면 소용이 없다. 망가진 외장하드 때문에 대학 시절 만들었던 많은 작업물을 날렸다. 몇 개는 간신히 친구들에게서 구해서 다시 봤다. 'Do it Yourself' 뮤직비디오도 그중 하나였다. 안타깝게도 한 번 보고 그 뒤로 소름 돋아서 다시 못 보고 있다. 다시 보기 힘든 존재이긴 하나, 공포스러운 기억 두 가지를 주긴 했으나, 나에겐 그래도 소중한 첫 영상이다.
습관은 때로 부작용을 낳는다
프로그램끼리 중요한 작업의 단축키가 충돌하면 굉장히 혼란스럽다. 지금은 첫 영상을 만들었던 프리미어를 쓰지 않는데, 프리미어에서는 클립 자르기 단축키가 'C'다. Cut의 약자. 지금 주력이 된 베가스에서는 클립을 자르려면 'S'를 눌러야 한다. Split의 약자다. 베가스 단축키가 손에 하도 익어서 이제 프리미어에서는 컷 편집을 잘 못한다. 너무 익숙한 습관은 때로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주문, [ Ctrl + S ]
어떤 작업을 하나 마칠 때마다 무조건 [ Ctrl + S ]를 누르다 보니, 웹페이지에서도 기사를 다 보고 [ Ctrl + S ]를 누르기에 이르렀다. 제어판에서도 글꼴 설치하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눌러봤다. 컴퓨터를 켜면 제일 많이 누르는 키일 듯하다. 키스킨도 왼쪽 컨트롤 자리는 늘 구멍이 나 있다. 다행히 [ Ctrl + S ]를 아무리 눌러대도 일반 화면에서는 아무 명령어도 아니기 때문에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 Ctrl + S ]를 누르면 파일을 지켜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해진다. 별 큰일을 발생시키지 않으니 굳이 고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일종의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에서도 글을 쓰면서 수정을 많이 하다 보니 내용에 골몰하다 나도 모르게 [ Ctrl + S ]를 눌렀었다. 다행히 여기에서도 이 단축키는 별다른 상황을 일으키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음 놓이게 마음 놓고 [ Ctrl + S ]를 눌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