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더하기 다섯. 그리고 몇 달 뒤에는 '더하기 6'이 된다. 40보다 50에 가까운 수. 반올림을 하면 50 이 된다. 그래도 나는 어색하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하긴 자신의 나이에 익숙한 현대인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하다. 큰 아이 열셋의 나이도 나는 익숙하지 않다. 어느새 아이는 훌쩍 자라 있다. 한때 내 새끼손가락을 잡고 걷던 아이였는데.
몇 년 전 지인은 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었다.
"아무래도 눈 시술할 때 했던 마취 때문에 기억력이 더 나빠진 것 같아."
사실 시술이 문제는 아닌 듯했다. 지인은 회사 복직을 앞두고 불안했던 것이다. 그는 건강 문제로 1년 여동안 회사를 쉬었다. 회사 복직이 다가왔을 때는 허리 디스크가 겹쳤다. 막 복직을 앞두고는 그를 내내 '신경 쓰게 했던' 짝눈이 마음에 안 들어했다. 허리나 눈의 문제는 애초부터 아니었을 게다. 회사 복직, 사회 시스템 안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40대는 초조하다. 시스템 안의 40대는 더 그렇다. 20대, 30대는 그저 일만 했다. 하지만 40대는 미래를 고민하게 된다. GO냐, STOP이냐. GO를 택하면 현재의 시스템 안에 최대한 녹아들어야만 한다. STOP을 택하면 또 다른 시스템을 찾고 또 적응해야만 한다. 미래 지속성이 보이지 않을 때는 STOP 쪽으로 기울지만 지금껏 시스템 안에서 쌓아온 커리어가 아까워진다. 아이들은 자꾸 눈에 밟힌다.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할 용기는 바닥부터 짜내야만 한다. 바닥 구석구석 찾아도 찾을 수 없다면 그저 멈춰있을 수밖에 없다. 나답게 살라고? 온갖 관계 안에 있는데 과연 나다운 것이 그 관계 밖에서 성립이 될까. 모든 관계를 잘라내고 나면 오롯이 내가 남을까. '나다운 것'이 그저 허울 좋은 구호라는 것을 40대 워킹맘은 안다.
직장생활 20년 즈음이면 지나온 길을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길 곳곳에 남겨둔 청춘이 아쉬워진다. 20대, 30대 때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미련은 더욱 짙어진다.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지나쳤는지. 분명 대신 얻게 된 것이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는 도통 모르겠다.
40대는 불혹이라, 의심이 없어지는 시기라고 하지만 옛날 옛적 평균수명이 아주 짧았을 적 얘기 같다. 그 옛날, 공자가 살던 시대에 40은 인생의 종반이었을 터.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모든 게 의심 투성이고 선택의 순간은 매일, 매 순간 온다. 아직도 나는 내 과거, 현재, 미래 선택에 물음표를 단다.
오늘을 죽여 내일을 살릴까. 오늘을 살려 내일을 죽일까. 오늘 같은 내일이라면, 내일도 오늘과 같다면. 과연 나는 어제를 죽여 오늘을 살렸던가. 오늘이 죽은 것은 어제를 살았기 때문일까. 어제를 살라먹고 난 어느 즈음에 서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깨어있는 밤이 길어진다. 40대는 불혹이 아니라 불면의 시기다.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나이는 주변의 변화와 함께 숫자가 아닌 것이 된다. 회사에서는 선배 소리(꼰대라는 소리를 안 들으면 다행이고)를 더 많이 듣게 되고 집에서는 아이의 학년이 매 해 바뀐다. 쉽게 도와주던 아이의 숙제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렇게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늙지 않기를, 낡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천천히, 서서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스며들기를. 부지불식간 느끼는 충격파는 되지 않기를 그리 바란다. 지진도 강진 전에 여진이 여러 차례 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