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양희 May 25. 2019

우리 엄마도 한때는 소녀였으니까

내 생일, 나는 부모님께 꽃을 보낸다

한 손에는 아이 책가방, 다른 한 손에는 상가 정육점에서 산 오리 고기가 들려 있다. 이질적인 두 물건의 무게에 몸이 뒤뚱거린다.


횡단보도 앞에 세워진 트럭 안이 온통 꽃밭이다. 프리지어, 장미, 국화 그리고 이름 모를 꽃 등등. 트럭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참 좋다. 꽃의 유혹 때문인지, 요즘 들어 마음이 허해서인지 주섬주섬 지갑을 찾는다.


 “유진아, 잠깐만.” 


아이는 짐짓 흘겨본다.


꽃을 한 아름 샀다. 프리지어 다섯 단과 이름 모를 꽃 여덟 송이. 꽃값이 싸다. 다 해서 1만4천 원. 일반 꽃집이었다면 3~4만 원은 족히 줬을 것이다.


기념일이 아닌데도 꽃을 사는 건 오랜만이다. 근데 우리 집에 꽃병이 있었나. 없는 것도 같다. 어쩌지. 현금으로 계산하는 동안 아이는 횡단보도 신호등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엄마, 신호등 바뀌었는데….”


조바심을 낸다. 낭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꽃을 내밀어도 시큰둥이다. 아홉 살 여자 아이의 감성이 그렇다.


“이 꽃은 프리지어야.”


“엉.”


건성건성이다. ‘꽃 이름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라는 식이다. 방금 끝낸 치과 치료가 적잖이 아팠던 듯도 하다. 한 때의 ‘사탕 홀릭’이 미래의 고통을 낳았다. 모든 달콤함에는 후폭풍이 따른다.

 

남편은 꽃 선물과는 거리가 멀다. ‘꽃 살 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 먹자’ 주의다. 꽃이 주는 시각적 행복과 맛있는
음식이 주는 미각적 행복은 분명 다를 텐데 같은 기준으로 판단한다. 하긴 나도 꽃 사는 값이 아깝기는 했었다. 한때의 아름다움만 남기니까.


아이들에게는 아직 꽃을 받아본 적이 없다. 카네이션은 어버이날 의무감으로 주는 거니까 논외로 치고. 아이가 스무 살, 서른 살이 되면 꽃을 받게 될까.


나는 부모님에게 매해 꽃을 선물한다. 어버이날에는 용돈만 드린다. 꽃을 드리는 날은 내 생일날이다. 부모님 생신이 아닌 내 생일에 내 나이만큼의 장미꽃을 제주도로 보낸다.


 해가 갈수록 장미꽃의 숫자는 늘어났다. 다행히 제일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꽃집을 해서 금액적으로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절친 DC’라는 게 있다. “나 꽃 좀 보내줘” 하면 친구는 알아서 “네 생일 다가오는구나” 한다. 꽃과 함께 카드도 쓴다. 문구는 간단하다.


 ‘엄마 아빠, 저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밥벌이가 가능해졌을 때 어느 시점에서인가 깨달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분명 사람들은 엄마에게 축하를 건넸을 텐데 정작 돌 이후부터는 나만 축하를 받고, 나만 축하받기를 원해왔다. 내 생일에 제일 감사할 대상은 부모님인데 말이다.

 
내 생일을 그렇게 자축하는 것은 15년 넘게 지켜온 나와의 특별한 약속이다. 꽃바구니를 받을 때마다 엄마는 “왜 나를 낳았느냐고 원망만 안 해줘도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다.


 사실 내가 현재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는 그다지 중요치 않은 문제다. 행복하건 불행하건 나는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던 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그 하루는 부모님이 선물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감사의 이유는 충분하다.

올해 보낸 안시리윰.

맨 처음 꽃바구니를 받았을 때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 눈물을 훔치셨다. 힘들게 번 돈을 왜 이런 데 쓰냐며 구박도 하셨다. 해마다 올해는 보내지 말라고 하시지만 막상 꽃바구니를 받으면 고맙다는 말씀을 연발하신다.


지난해에는 “꽃은 빨리 시드니까 차라리 관상용 식물을 보내라”라고 당당히 요구도 하셨다. 둘째 딸의 고집이 안 꺾일 것이라는 걸 알기에 찾은 나름의 타협점이다. 공기 정화에 좋다는 큼지막한 수투키 화분을 보냈다. 문구는 똑같다.


‘저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부도 동생 생일에 장모, 즉 우리 엄마에게 꽃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 하는 거냐고 동생에게 짓궂게 물었더니 “딸보다 사위한테 꽃을 받으면 더 좋아하실 거야”라고 대꾸한다. 아무렴 어떠랴. 5년, 10년, 20년… 나는 부모님께 꽃을 보낼 날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물론 나 스스로의 경제활동으로 번 돈으로.  


국화와 장미를 조금씩 닮은, 꽃잎이 풍성한 ‘이름 모를 꽃’의 이름을 알아냈다. 라넌큘러스. 페이스북에 올린 꽃 사진을 보고 회사 후배가 댓글을 남겨줬다.


라넌큘러스라는 이름은 ‘개구리’를 뜻하는 라틴어 ‘라이나’에서 유래했는데, 주로 연못이나 습지 같은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꽃말은 ‘매혹’ ‘매력’. 300장이 넘는 꽃잎이 둥글게 포개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매혹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처 다이소에서 산 5천 원짜리 꽃병에 노란색 라넌큘러스와 프리지어를 꽂아두고 한참이나 쳐다봤다.

 
누구나 한때는 꽃이었다. 만개의 순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였을 수도 있다. 라넌큘러스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수백 겹의 꽃잎을 작은 봉우리 안에 품고 때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프듀 시즌 2>의 연습생들처럼. 강다니엘은 그런 면에서 라넌큘러스를 닮았다.


강다니엘 하면 꽃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데뷔 후 부산에서 처음 만난 엄마에게 안긴 꽃이 수국이었다.
수국의 꽃말은 ‘소녀의 꿈’. 강다니엘은 말했다.


우리 엄마도 한때는 소녀였으니까.”


너란 녀석, 말도 참 잘한다.


소녀 같던 시절도 있었지만 ‘아줌마’라고 불리는 게 현실이다. “나도 소녀였던 때가 있었거든”이라고 항변해도 나조차 그 시절이 아득한데 남들이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있을까. 다만 이해는 구하고 싶다. 우리 아들도 강다니엘처럼 나중에 커서 “엄마도 한때는 소녀였잖아”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아들에게 엄마는 아직 그저 ‘엄마’니까.


다시금 궁금한 의문.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쯤 꽃을 받게 될까. 어버이날 받는 카네이션은 왠지 너무 무겁다. 감사의 의미도 있겠지만 부모의 의무를 다해 달라는 뜻 같다. 이왕이면 빨간 장미꽃이나 노란 프리지어를 받고 싶다. 프리지어의 꽃말은 ‘청순함’과 ‘천진난만함’.


여기에 오늘 라넌큘러스도 추가됐다. 습지에 살더라도 수많은 꿈들을 품고 사는, 지는 그날까지 매혹적인 라넌큘러스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에 밥 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