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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Oct 12. 20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빨래, 그리고 설거지

눅눅한 날이 이어진다. 빨래는 쌓여간다. 말릴 공간은 부족하다. 베란다에는 식물들이 가득하다. 


'그래, 돌리자.'


우리 집에는 건조기가 없다. 하지만 10년 넘은 세탁기에 건조 기능이 있다. 신혼살림 장만 때 꽤 좋은 것을 샀다. 그동안 건조 기능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구겨져서 다림질을 해야만 하는 옷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겹겹이 산을 이루고 있는 빨래를 보니 결심이 선다. 돌리고 나서 후회가 밀려올 듯도 하지만. 


사실 나는 햇볕에 말리는 빨래를 좋아한다. 회사 후배들이 "요즘 건조기 참 좋다"라고 권해도 고개를 젓는다. 옷감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다. 빨래는 햇볕에 말려야 한다... 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빨래 널기를 핑계 삼아 나 또한 '광합성'이라는 것을 하고. 건강검진 때마다 비타민D 부족이라고 나오니까 볕이 있을 때 볕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빨래를 널다 보면 그냥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릴 적 자취할 때부터 그랬다. 햇볕과 공기가 옷들에 스며들어 옷들도 다시금 숨을 쉬는 것 같다. 뽀송뽀송. 그렇게 옷이 웃는다.

우리 집에는 식기 세척기도 있다. 빌트인이다. 물론 이 또한 쓰지 않는다. 어쩌다 수납장이 됐다. 세척기는 식기 구석에 조그마한 흔적들을 남기고는 한다. 


미국에서 1년간 살 때도 그렇다. 주변의 지인들은 한국보다 싼 전기료를 이유로 들면서 건조기, 세척기를 사용했지만 나는 손수 했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모든 게 귀찮아졌을 때는 그냥 식기세척기를 돌렸지만 말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돼가며 편리해지는 사회지만 빨래나 설거지만큼은 그냥 내 두 팔로 하고 싶다. 하루 종일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전자파 위에서 부유하던 두 손에 차가운 물의 감촉을 느끼게 하고 싶다. 그리하면 조금 디지털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어차피 소요시간은 10~20분. 바쁘다 핑계될 시간은 아니다. 어차피 휴대폰 만지작 거릴 시간일 테니까.  


 아날로그 인간이다. 기계화되지 못한 인간이기도 하다. 불편해도 그냥 이대로 조금은 더 버티고 싶다. 겨울이 다가와 건조기가 필요한 시기가 올 때까지. 물론 그때도 한 줌의 햇볕에 감사하며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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