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할머니할아버지 집에 왔다. 내가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제 나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더욱더 짙어진 그들의 삶의 모습이 떠난 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할머니는 여전히 바삐 다니며(마을회관, 요가, 노래교실, 운동장 등) 하루를 보내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너무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 평생의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역시 언제나 집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오랜만에 본 얼굴이 반가운 동시에 평소보다 훨씬 풍성하게 다른 방향으로 뻗친 머리에 눈길이 갔다. “할아버지! 머리 스타일이 바뀐 것 같아. 가르마 위치를 바꾼 거야?” “그래...? 몰러~”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다른 얘기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내던 중, 노래교실을 끝마치고 돌아오던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옷 입고 기다리시라 그래~ 머리 자르러 가셔야 된다고.” 오늘은 마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미용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귀차니즘으로 인해 두 달간 미뤄온 머리를 깎고, 할머니는 몇 달 전 사고로 인해 꿰맨 두피가 다 아물어 파마를 할 거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오늘마저 귀찮다는 말을 넌지시 꺼냈다가 결국 할머니의 불호령에 나갈 준비를 했다) 두 사람을 보러 왔는데 집에 혼자 있기가 아쉬워 나도 가겠다며 따라나섰다.
고향에 온 것도 오랜만이지만, 이 미장원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안은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가스난로, 샴푸대, 화장실 열쇠, 한 켠의 온돌마루, 빨간 소파, 중고로도 구하기 어려운 책들까지. 혹시 이곳의 시간만 완벽히 멈춰있는 게 아닌가...? 하고 있을 쯤 눈에 들어온 세월이 잔뜩 담긴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을 보고 현실임을 자각했다. 미장원에 들어가니 모든 손님의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다. “잠바는 여기 둬~”, “추운데 여 와 앉어~” 홀린 듯 변색된 흔적이 만연한 온돌마루에 앉았다. 엉덩이부터 시작해 온몸이 뜨셔 졌다. 옆에 계신 할머니는 아이고~ 하시며 데펴지고 있는 내 손을 쓰다듬으셨다. “몇 살이야~?” 내 대답을 들으시고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20대로 돌아가 이야기가 시작됐다.
문화미장원에서는 사과도 팔고 현미도 판다. 미용사 선생님이 머리를 감거주러 가신 동안엔 이 안에 있는 누구라도 흔쾌히 미장원의 운영자가 된다. “사과 두 봉지? 여기 봉다리에 넣어줄게~“, ”이거는 쪄먹어도 되는디 튀겨먹어도 좋아~“ 옆에선 다른 할머니가 바닥에 새까맣게 쌓인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어담고 계신다. 머리를 말고 있는 손님은 미용사 선생님께 알맞은 타이밍에 고무줄을 건넨다. 머리 말기가 끝나면 자연스레 온돌마루에 앉아 온열 모자를 쓰고 코드를 꽂는다.
“우리 손님들은 알아서 척척 잘하셔~”
“하하하하 그렇지~~”
이곳은 사랑방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곳이다. 문화미장원에 앉아 있는 동안엔 세상만사 어떤 일도 걱정을 비켜 간다. 할머니랑 온돌마루에 앉아 그간의 근황을 나누고 있다가도 할머니랑 얘기하는 모습이 예뻐죽겠다며 칭찬받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손조차도 예쁨받는다. 동네의 온정이 한데 모여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다. 할아버지는 순서를 기다리다 눈에 들어온 꽃을 보며 웬 꽃이 한겨울에 이렇게 활짝 폈냐며 좋아하셨다. 미용사 선생님은 이상하게 겨울에도 자꾸만 꽃이 핀다고 예쁘지 않냐고 말하셨다. 다른 할머니는 여기 꽃이 너무 예뻐서 꽃 보러 또 와야겠다고 그러셨다.
“이 꽃 조화야. 나도 한참 속았다가 얼마 전에 알았어.“ 우리 할머니가 내게 속삭였다. 사실을 아는 건 셋뿐이다. 아무렴 어때. 꽃은 예쁘고 이곳은 따뜻하다. 꽃은 언제나 피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