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by 마디


며칠 전 앨범에 있는 옛 사진들을 보다 오래전 캡쳐해 둔 시 한 편을 발견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오 년 전이었다. 그때 난 이십 대 초반이었고 R과 함께 뭐든 했다. 엄마 차를 빌려 작은 섬으로 가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해 질 무렵 바다로 달려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 눈물을 흘리고, 무더운 여름에도 한기가 서리는 듯한 깊은 산속으로 캠핑을 떠나고, 오랜 옛 친구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과 음악과 영화를 모조리 섭렵하고 있는 어떤 애를 동경하다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우린 언제든 바닥에 철푸덕 앉아 깔깔 웃었고 한껏 취해 나자빠져 보기도 했다. 신기하게 지금 이 시간이 꼭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때가 나한텐 그런 시절이었고, 그래서 뭐든 했다. 그리고 내겐 언제나 함께하는 R이 있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게 실감 난다. 그때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돌아가고 싶은 날이 있는 반면 그때 충분히 누리고 R과 많은 시간을 보내두었음에 안도하거나 감사함을 느낄 때도 있다. 한 번 좋아하면 너무 깊이 좋아해 버리고, 쉽게 상처받고, 자주 창피해지고, 바다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그 시절이 혹시 꿈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제 우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각자의 일을 한다. 아무리 해도 닿지 않던 짝사랑을 끝내고 어쩌면 앞으로 쭉 함께할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우리가 전부인 줄 알았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랐지만, 서로의 울타리보다 훨씬 크고 넓고 견고한 세상을 마주했다. 그럼에도 R과 난 여전히 친구다. 여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애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깔깔 웃는다. R의 행복과 슬픔, 나의 행복과 슬픔을 나눠 가지며 서로의 세상을 알아간다.


며칠 내내 그 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 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 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 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 하자면 너무 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 리고 싶었을 때 그 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청춘> 심보선 / 슬픔이 없는 십오초 / 문학과지성사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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