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에게

by 마디


우리 만나면 항상 언제쯤 밝게 웃을 수 있을까 하잖아. 오늘도 그러고 집에 오는데 하루 종일 웃었던 기억밖에 안 나는 거야. 세상엔 웃음에도 총량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 많이 울었을 때, 그때 다 지나고 우리가 만났나 봐. 어디서나 해맑게 웃을 순 없어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곳이 있잖아. 너를 만난 건 천운이야.


우리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잖아. 그땐 이렇게 가깝지 않았는데. 네가 자퇴하고 몇 달 지나서 나한테 연락했을 때 그래서 되게 놀랐어. 네 기억 속에 내가 남아있다는 게 신기하고 좋았어. 그때 네가 해준 말 때문에 나 되게 감동받았었다? 아무도 내 진짜 모습을 알아주려 하지 않았는데 네가 그걸 입 밖으로 꺼내준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나조차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걸 비로소 알아채는 순간이었어. 그날 되게 설레고 묘한 감정 때문에 밤을 새웠어. 내 안에 있던 꿈 같은게 막 다 튀어나와서 뭐든 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던 것 같아. 꼭두새벽에 옥상에 올라가서 해 뜨는 것도 봤어. 그날 난 뭔가를 다짐했던 것 같아. 뭐든 하나는 이뤄보자는 다짐. 그땐 디자인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으로 진지하게 나가보려 했었어. 토요일마다 두 시간씩 버스 타고 서울로 학원 다니고, 당시 유행하던 패션 정보 공유 앱에 사진도 막 올려보고, 페이스북에도... 아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어떻게든 서울로, 그 근처라도 가서 공부하고 아니면 유학 가서 꼭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사람들에게 정말 인정받고 싶었어. 그때 내 곁에 네가 있었다면, 네 곁에 내가 있었다면 우린 좀 달라졌을까?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넌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었지. 없는 돈과 시간을 쪼개 과외 공부하러 다니고, 다시 아르바이트 하고. 그렇게 꼬박 1년을 내내 살며 넌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어냈어.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시험장에서 가장 빨리 쓰고 끝을 기다렸단 네 말에 웃음이 나더라. 그런 네 모습이 너무 상상돼서. 네가 지닌 특별한 감각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능력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끝까지 해내는 마음이야. 자퇴하고 죽도록 공부해서 서울로 올라온 것도, 일하던 곳의 원장님들이 그토록 너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것도, 원하는 꿈이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결국 시작하게 된 게 다 그에 대한 방증인 거잖아.


우리 대화할때면 어느새 각자의 환경에서 애쓰고 있던 두 어린아이가 눈 앞에 있어. 작고 슬프던 시절엔 서로가 곁에 없었지만, 그때를 얘기하다보면 마치 다 알 것만 같아. 우리가 좀 더 친절한 아버지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예쁨받았더라면, 존재 자체로도 가치 있다는 걸 미리 알려줬더라면. 내가 가진 무언가로 칭찬받을 수 있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칭찬을 의심해. 내가 볼 땐 다른 사람들 다 너무 예쁘고, 안아주고 싶은 모습투성이인데... 과연 나도 그런지에 대해서는 수만 가지 이유를 넣어 생각해 보려 해. 예쁘다는 말이 낯설고 때론 눈물이 나. 나를 조금만 더, 아니 그냥 많이 칭찬해 주지 그랬어요. 그런 걸 다 알게 됐을 때쯤 난 꽤 많이 컸고, 타인의 입으로 들었던 나에 대한 말들에 이미 스스로 너무 익숙해졌던 것 같아. 그래도 자꾸만 내게 너른 마음을 베풀려 노력해. 노력해야만 겨우 할 수 있거든. 가족에게 마음껏 응석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부러워하곤 해.


생각해보면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주변인들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국엔 자신의 과거를 어떤식으로든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 같아. 너무 슬프게만 남지 않도록, 때론 그냥 웃어넘길수도 있게 말이야. 아팠던 얘기를 입밖으로 꺼내는 것 조차 눈물이 고이던 때가 있었는데, 내겐 그래서 좋은 친구들이 항상 곁을 지켜줬나 봐. 너랑 만나 나누는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다시 쓰고 살아갈 힘을 얻어.

언젠가는 우리가 밝게 웃을 수 있을 날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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