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땐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아는 건, 그럼에도 써야 한단 사실 뿐이다. 나와 한 약속은 오로지 쓰기뿐인데, 이것까지 안 할 수는 없다. 빠져나갈 구멍은 지금 여기에 무엇이라도 써서 글을 완성하는 것이다. 막막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핸드폰 화면을 켜 지피티에게 물었다.
[쓰는 게 도무지 어려운 날은 어떡해?]
[그냥 안 쓰는 것도 방법이야.
근데 완전히 놓기도 애매하면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오늘 있었던 일을 단어로만 나열해 봐.]
답변대로 일단 오늘을 복기하며 떠오르는 단어를 적어보기로 한다. <오전 모던패밀리 버스정류장 영화 저녁약속 떡볶이 커피 햇빛 산들바람> 적은 단어를 차례로 읽어본다. 프리스타일 랩 배틀에서 어처구니없는 조합의 제시어를 받은 래퍼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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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갓진 오전을 보내고 집 밖으로 나왔다. 전에 다니던 직장 동료와 저녁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엔 매일같이 타던 버스를 기다리는데 문득 생각이 스쳤다. ‘완전히 잊을 필요 없는 일들은 쉽사리 잊혀지고, 어떻게 해서든 잊고 싶은 기억은 자꾸만 들러붙어 나를 따라다닌다. 너무나도 강렬하게.’ 많은 상처와 기억이 있는 그곳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무거운 탓이다. 그만둔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구나. 더 이상 그곳은 내게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여전히 숨 막히는 답답함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아챈다.
저녁 약속을 무사히 끝마쳤다. 일할 때 자주 가던 곳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는 건 왠지 이상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익숙한 감각이 묘하게 이질적이어서였을까. 그치만 도착하기 전까지 했던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던 건 사실이다. 막상 겪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것들이 세상엔 더 많으니까.
때론 혼자가 되었음에 해방감을 느끼는데, 지금이 그렇다고 퍽 느꼈다. 그리고 곧장, 그나마 일터가 여기여서 좋다고 생각했던 몇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였던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그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떡볶이를 포장하며 세상살이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했다. 다소 비약일 수 있지만, 좋음과 그렇지 않음은 늘 이렇게 붙어있다. 손에 들린 떡볶이는 마치 직장을 그만두고 얻은 자유만큼 묵직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맛있을까, 하며 올라탄 버스 창밖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퇴근 시간과 딱 들어맞아 꽉꽉 들어찬 버스 안으로 강한 주황빛 노을이 비쳤다.
해가 지고, 미리 예매해 둔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갔다. 지난번 씨네큐브에서 보고 기억에 남았던 포스터가 있는데, 마침 휴무인 오늘 시간이 딱 맞아서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세 감독 각자의 작품이 한 영화 속에 연달아 이어졌고, 이 독특하고 실험적인 연출 방식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세 편의 영화 모두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영화가 그들에게 준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말 애정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나간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자신이 겪었거나 혹은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을 배우와 스태프들이 함께 많은 시간과 체력을 들여 완성해 내는 과정을 심도있게 상상해 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몇 가지 생각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하고 싶은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할 수 있을까. 기왕 시작한 거 잘하고 싶은데 어떡하지. 아니야 너무 잘 하려고는 하지 말자.' 어떤 날엔 끝없는 스트레스 같다가도 어떤 날엔 가만히 오래 앉아 행하게 되는 그런 일을 자꾸만 생각했다. 아무 문장도 떠오르지 않던 하루는 끝내 여러 문장들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