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식으로 성장하는 디자이너
언제쯤 성장할 수 있을까, 경력 있는 시니어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이 까마득하던 신입 디자이너 시절.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더디게 성장하는 자신이 답답하고 이렇게 얼마나 일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후회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간과 노력에 비례한다면 벌써 수직 상승해야 하는 실력인데 여전히 머리로 생각하는 걸 손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제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오늘 한식주점 브랜딩 디자인을 맡아 타이포그래피를 다듬던 슝대리가 여러 차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끈기 있게 패스를 다듬는 모습을 보니 예전 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오늘은 성장에 대해 괴로워하는 디자이너들에게 나는 어떻게 그 시기를 견디며 10년의 시간을 보냈는지 조금 적어보려 한다.
고난을 만나면 사람은 성장한다.
인간극장, 사람이 좋다 등등 인생에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든 고비를 넘기며 소중한 것을 깨닫고 더 깊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늘 평탄하고 어려움을 모르고 산다면 인생을 헤쳐나가는 힘도, 방법도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기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면 나는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여러 가지 기획단계를 거쳐 콘셉트를 정하고 그에 맞는 디자인에 돌입한다. 이때 운이 좋다면 내가 원래 잘하던 스타일을 맡을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맡을 수도 있다. 물론 회사가 아주 크거나 업무분담이 잘 되어있다면 잘하는 것만 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디자인 에이전시가 잘하는 일만 하게 놔두진 않았다. 그래서 어찌 됐건 낯설고 어려운 일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업무이니 잘해보려고 노력을 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처음 해보는 작업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준다. 생각한 대로 혹은 스케치한 대로 나오지 않는 디자인이 야속하고 지금껏 나는 어떻게 디자인을 하고 있었나?라는 자괴감도 들게 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거나 아예 디자인을 그만두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하듯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면 시안은 완성이 되어 있다. 주변에 디자인 코칭을 해줄 수 있는 사수가 있었다면 더 빨리 끝났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리에 앉아 나의 디자인과 마주 앉아 오랜 시간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분명 원하는 디자인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 그 고비를 넘기면 그다음 작업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수월해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번 올린 레벨만큼 지속적으로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마치 RPG 게임에서 스킬을 습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나와 내 동료들은 ‘계단식 성장’이라고 불렀다. 디자인은 시간과 노력이 비례하여 대각선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계기를 통해 순간적으로 실력이 상승하고 상승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다 또 한 번 깊은 고민과 노력을 요하는 작업을 통해 다음 단계로 올라서듯 성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께도, 어제도, 오늘도 내가 똑같은 상태인 것 같다고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디자이너는 매일매일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점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연휴 내내 고민하고 패스의 끝을 올렸다 내렸다 했던 슝대리의 경험 역시 다음번 타이포그래피 작업에서는 훨씬 빛나는 실력을 빛을 낼 것이다. 그렇게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디자인의 영역으로 올라서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혹시 오늘 밤, 성장이 더딘 자신의 디자인 실력 때문에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고 있다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디자인을 시도해보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하지 말고 이것을 완성시킨다고 생각하고 아주 조금씩 조금씩 손봐가며 하나를 완성해본다면 반드시 새로운 단계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이런 후배를 둔 선배 디자이너가 있다면 따뜻하고 다정하게 피드백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혼자 하는 100번의 시도보다 노련한 선배 디자이너의 코칭 한 번이 부스터가 되어 폭풍성장을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