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브랜드데이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오후, 피플의 디자이너들은 회사를 떠나 부산 시내에서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를 찾아 떠나는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경험과 관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분야인 만큼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나 여러 브랜드를 실제로 경험하며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누어보는 과정은 앞으로 우리가 만날 다양한 디자인 작업에 입체감을 더해줄 것입니다.
이번 달의 브랜드데이는 11월, 12월 브랜드데이를 합쳐 해마다 전국의 디자이너들이 모여드는 곳, 2021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을 다녀왔습니다. 20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의미 있는 자리였던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피플의 디자이너들은 어떤 프로젝트들을 눈여겨보고 왔을까요? 이번 브랜드데이는 피플의 브런치 매거진을 발행하고 있는 제가 기록으로 남겨보았습니다. 즐겁게 읽어봐 주세요.
새벽을 뚫고 서울로
아직 제대로 해도 뜨지 않은 시간, 서울에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서울에 한번 가려고 치면 항상 어둑어둑할 때 첫 비행기를 타러 출발했는데 이 날도 어김없이 공기가 푸르스름한 새벽 시간 서둘러 집을 나섰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용하는 사람들 마다 KTX가 좋은가, 비행기가 좋은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우리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서울역에 내려 빠르게 도심으로 접근할 수 있는 KTX에 비해 김포공항에서 시내까지는 꽤 오래 걸리는 편이지만 직각 자세로 조금 덜 앉아있어도 된다는 점과 비행기가 주는 낭만을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20주년, 명실상부한 디자인의 역사,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코엑스에 내려 앞으로 약 4시간 정도는 앉지 못하고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코인라커에 가방을 맡기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해마다 풍경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전시장 입구는 가만 보니 전시장의 파사드가 인쇄물에서 LED로 바뀌었다.(작년, 혹은 재작년에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휘향 찬란하게 움직이는 텍스트들을 보면서 인쇄기반으로 일하는 나의 마음이 심리적으로 살짝 위축됐다.
올해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의 기획과 메인전시까지 모두 일상의실천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입구의 거대한 미디어아트부터 디자이너 컬래버레이션 전시까지 다른 해의 전시들보다 비교적 일관성 있게 느껴졌다. 일상의실천은 우리 사무실에 차고 차곡 모아두는 책들로부터, 잡지로부터, 온라인 클래스로부터 꾸준히 (혼자) 만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였는데 이번 전시기획을 보면서 이제는 더욱 범접할 수 없는 레벨의 디자인 스튜디오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처럼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주목하고 있는 스튜디오를 운영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연예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상상도 해볼 수 없는 마음이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의 글자인 S, D, F로 이루어진 디자이너 컬래버레이션 굿즈들. 그 와중에 우리 프로토 컬러인 주황색과 남색(적으니 촌스러운 느낌이다)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
신선한 아이디어, 재미있는 표현들
오랜만에 갔던 디자인페스티벌이어서 그런지 참여한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다들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그중 가장 눈여겨보았던 프로젝트 4개를 뽑아 정리해보았다.
1. 컵 달린 굽
'컵 달린 굽'은 레트로 한 레터링이 시선을 끌어 가까이 가서 보았다. 부스의 전체가 한 권의 동화책처럼 나열되어 있는데 크게 관심이 없거나 글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제법 많은 텍스트의 분량 때문에 멀리서 잠시 보고 스쳐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컵 달린 굽'이란 컵에 달린 굽이 아니라 '굽'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다. 음료를 흘리면 테이블에 동그랗게 남는 컵 자국의 원인을 찾을 때 사실 음료를 흘린 것은 컵인데 억울한 눈총을 받아야 하는 '굽'이 컵과의 상생을 위해 아예 굽을 허리춤까지 키워 음료가 허리춤쯤에서 맺힐 수 있도록 성장(?)하게 된 스토리를 가진 디자인이다. 컵에 달린 부속품쯤으로 살아야 했던 굽, 그럼에도 종종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던 굽의 스토리텔링이 재미있어서 나는 구석구석 적혀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읽어보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부스를 떠날 때쯤 '컵 달린 굽'이 굽이 높은 형태의 컵 제품 디자인인지, 아니면 동화 같은 이야기의 콘텐츠인지 판단하기가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만약 경계 없이 소비자가 알아서 느끼도록 하는 의도였다면 합격을 주고 싶다.
2. 분리수거에 진심인 사람들, ADD+GE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아주 많은 부분들이 온라인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 아마도 '쇼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온라인 쇼핑의 끝에는 어김없이 산처럼 쌓이는 택배박스들이 있는데 분리수거가 가능한 날이 일주일에 1일밖에 되지 않다 보니 쌓여가는 택배박스를 잘 정리하는 것이 일상의 숙제처럼 돼버렸다.
그런 나의 고민과 우리 모두의 고민을 눈치챈 디자이너가 만든 [ADD+GE, 분리수거에 진심인 사람들]은 택배박스를 유용하게 잘 보관할 수 있도록 후크 하나로 명쾌한 해답을 준다. 택배박스를 잘 펼쳐 차곡차곡 후크에 걸어 보관하면 되는데 '명쾌한 해답'때문일까? 부스는 선명한 파란색과 흰색의 대비로 아주 시원한 느낌을 주도록 구성되어 있어 시각적으로도 이미지가 잘 전달되고 있다.
3. 재능 있는 사람들의 메타버스, 제조도
우리가 운영하는 디자이너 그룹 프로토에도 메타버스 공간이 게더타운으로 만들어져 있다. 처음엔 줌으로 운영하던 온라인 프로그램을 게더타운으로 옮겨 그곳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아주 작은 아바타이긴 하지만 수업에 들어와 참여하고 소통하면 어느 정도 오프라인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귀여운 디자인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던 '제조도'도 게더타운처럼 온라인으로 사람들이 그 속에서 활동할 수 있는 메타버스 공간이었는데 조금 재미있었던 부분은 실제의 부동산처럼 각자의 공간이나 섬을 분양한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감이나 느낌을 말할 때 "감 잡는다"라는 말을 사용해서인지 제조도부스에는 제주도처럼 귀여운 감나무가 있고 거기서 오늘의 '감'을 찾아보는 현장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었다.
기존 세대와는 달리 다양한 일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MZ세대들에게는 메타버스를 통한 업무환경도 전혀 어려운 부분이 없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측처럼 제조도 부스에도 그야말로 많은 MZ세대들이 몰려 적극적으로 공간에 대해 문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성세대는 메타버스가 실체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앞으로의 메타버스 공간은 오프라인의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스였다.
4. 호랑이 핸드크림, 디자인 쿱
호신용 부적으로 호랑이 핸드크림을 가방에 하나씩 지니고 다니라는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보았을 땐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가서 보니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귀여운 멘트였다.
월간 디자인을 발행하는 <디자인하우스>가 창작자의 권리 보호와 디자인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시작한 플랫폼 '디자인 쿱'에서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코스맥스와 함께 흑호 해를 맞이하여 디자이너들과 컬래버레이션한 호랑이 핸드크림을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 말이 있는데 흑호 해여서 그런지, 아니면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착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디자인 에디션의 목적이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알린다'라고 하니 호랑이 핸드크림은 너무나 적절한 아이템이 아니었나 싶다.
디자이너들의 실명을 알리는 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존중받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의 삶은 대체로 한 회사의 부속품처럼, 한 프로젝트의 그림자처럼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프로토도 디자이너들이 이름이 계속해서 수면으로 떠올릴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보고 온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후일담이지만 전시를 다 보고 저녁 9시 반 비행기를 끊어놓은 덕분에 부리나케 달려가 더현대까지 다녀왔다. 백화점도 마감시간이라 다 둘러보진 못하고 가장 가보고 싶던 언커먼스토어와 나이스웨더, 모베러웍스 팝업스토어를 보고 왔다. 하루를 몽땅 다 쏟았던 이번 브랜드데이는 잠시 심드렁해있던 디자인에 대한 마음을 약간, 아주, 조금 일렁이게 만들어준 좋은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