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살을 돋게 하는 마음, 진심

말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다를 수가 없다.

by 여름바다

전주로 이사 온 지 3일이 된 어느 금요일이었다. 퇴근 후 남편과 못다 한 짐 정리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었다. 마침 주문해놨던 '물 벽지'도 박스에 담겨 문 앞에 놓여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벽지를 물에 담갔다가 벽면에 붙여 보았다. 생각보다 재질이 맨들 거리고 색이 너무 하얘서 집안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거실 한쪽 측면에 정신없이 자리 잡은 화려한 무늬의 벽지를 볼 때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사 온 집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나를 남편은 계속 위로해 주었다. 벽지 시공업체 예약도 해주었다.


'물 벽지'를 붙이기 전에 벽에 박혀있던 못을 빼느라고 힘을 많이 뺀 남편도 조금 지쳐있었다. 이사 후 못다 한 짐 정리를 이제 시작해야 했다. 집안 여기저기 짐 보따리들이 가득 놓여있었다. 시간은 벌써 저녁 8시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이 엉망인 상태를 참기 힘들어서 꼭 정리를 끝내고 싶었다.

둘 다 기분이 썩 좋지 않고 힘이 빠져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 이제 짐 정리할까?"


"어?, 나 오늘 8시부터 명기 선생님 강의 있는데. 짐 정리 내일 하면 안 될까?"


금요일이면 남편이 듣는 강의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내일 하자고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집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오빠의 일정을 처음으로 배려해주지 못했다.


"짐 정리 오늘 하기로 했었잖아. 나 집 빨리 깔끔하게 만들고 싶어 오빠"


남편의 할 일을 못하게 만들어서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이사 후 짐 정리는 함께 해야 할 일이고 집을 빨리 쾌적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 그래! 짐이 옷 밖에 없네. 빨리 하자~"


"응! 고마워 오빠"


이사 오기 전에 비해 드레스 룸이 작아서 넘쳐나는 옷이 골칫거리였다. 둘이 방에 앉아서 각자의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40분 정도 흐른 뒤 남편이 먼저 옷 정리를 마쳤다.


"끝~! 다했다."


"와~오빠 수고했어."


"아니야~ 여보 꺼 정리 같이 할까? 이거 정리하면 돼?"


"아니야. 거의 다해서 혼자 해도 괜찮아. 나도 곧 끝나"


옷 정리를 마쳤다. 이제 집안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들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자 남편이 다가왔다.


"여보. 같이 하자. 같이해~~ 뭐하면 돼?"


이미 남편은 할 일을 다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집안을 꾸미느라 바빴기 때문에 딱히 명확하게 시킬 일도 없었다. 남편이 강의가 덜 끝났음에도 몇 번이고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해줘서 고마웠다.


자잘한 짐 정리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혼자서 1시간 정도 일을 더 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옷을 말리려는데 잘 되던 건조기가 갑자기 말썽이었다.


"오빠~! 건조기 고장 났나 봐. 이것 봐. 소리가 엄청 크게 나다가 멈춰"


"아 진짜?(옷방으로 달려온다.) 어? 그러네?


"이삿짐센터에서 또 뭐 잘못했나 보다 오빠"


"그러게. 어쩌겠어. 고쳐야지 뭐.

내가 내일이나 월요일에 A/S센터에 전화해볼게"


"그래. 고마워"


정리를 마치자 중문 앞에 내가 던져놓은 재활용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거실에 나와 정신없는 벽지를 보자 집이 다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휴. 몸도 마음도 급격하게 힘들어졌다.


남편이 얘기했다.


"여보. 쓰레기들은 내가 내일 아침에 버릴게"


"응 고마워"




오늘은 드디어 거실 벽 도배 견적을 보러 오는 날이다. 남편은 서울에서 임장 및 재테크 모임이 있어서 새벽에 KTX를 타고 올라갈 예정이었다. 나도 오후에는 전주로 이사 오면서 가까워진 친정집에 갈 계획이었다. 도배업체는 1시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 오전에는 잠깐 카페 가서 글을 쓰면서 여유를 즐기려고 어제 계획을 세워놨었다.

새벽 잠결에 남편이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아침 8시쯤 눈을 떠서 거실에 나왔는데 중문 앞에 쓰레기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에효. 새벽에 나가느라고 바빴나 보네. 내가 치워야지'


쓰레기 정리를 해놓고 나니 한결 깨끗해진 집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처음으로 오전에 집에 있어보니 햇살도 잔뜩 잘 들어왔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아침을 차리기 시작했다.


'밥 든든히 먹고 카페 가서 진한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


제일 좋아하는 코스였다. 아침을 느지막이 든든히 먹고 카페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오후쯤 디저트로 배를 채우는 일 말이다. 밥상을 잘 차려놓고 맛있게 밥을 먹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응? 지금 9신데? 도배하러 벌써 왔나?"


"누구세요?"


"에어컨 설치기사예요"


'아! 맞다ㅠㅠ. 하, 에어컨 설치하는데 오래 걸릴 텐데. 카페는 언제 가지.'


건장한 등치의 젊은 남자 두 명이 검정 반팔 반바지 운동복을 입고 나타났다. 각종 장구들이 잔뜩 든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로.


평소 세탁소 아저씨에게 옷 수거를 부탁할 때도 남편이 있을 때 했었다. 혹시나 위험할까 봐 조심했다. 그런데 한 주먹 하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에어컨 설치를 하러 왔으니 웬 말인가.

2 in 1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기사분들은 거실과 안방 베란다를 왔다 갔다 했다.

나는 내 집 같지 않은 느낌으로 불편하게 거실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집을 빨리 정상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잘 참고 있었다.


'커피는 테이크아웃해서 집에 와서 마셔야겠다. 에어컨 설치 끝나고 가면 또 금방 도배 업체에서 올 테니까'


문득, 건조기도 빨리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빨래가 꽤 많이 쌓여있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었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또 통화 중이었다.

남편과 나 둘 다 통화 중 걸려온 전화가 기록되는 '골키퍼'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에 계속 전화를 걸었다.


연신 전화를 걸면서도 오늘따라 내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전화를 걸어서 통화 중이면 한참 뒤에 걸었다. 지금은 5분이 채 지나기 전에 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적어도 10번은 걸었던 것 같고 남편은 계속 통화 중이었다. 공인중개사랑 통화하나 싶었다. 건조기를 빨리 고치려면 A/S 접수를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전화를 계속 걸었다.

드디어 신호음이 걸렸다. 근데 남편이 전화를 거절했다. 어떻게 걸린 전화인데 거절을 하면 어떡하나.

서운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고 남편이 받았다.


"어~ 여보~"


"오빠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한 10번은 한 것 같아"


"아. 베리 님이랑 계속 스피커 폰으로 통화하느라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대화를 하느라고 1시간 정도 남편 핸드폰을 공용으로 썼었다고 한다.)


"오빠 건조기 A/S 접수 신청했어?"


굉장히 따져 묻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전화를 계속 걸 때부터 뭔가 내 기분이 오락가락했었다.

벽지도 계속 마음에 안 들었고 카페에 못 가고 불편하게 집에 있는 것도 싫었다. 나 혼자 집안일을 많이 책임지는 것 같아서 억울했었다. 기분이 너무 심상치 않아서 생각해보니 곧 생리할 때가 되기도 했었다.


그동안 남편에게 따지듯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책임을 돌리거나 확인하는 듯한 말투를 써본 적도 없었다.


"아~ 그거 오늘 A/S센터 안 하니까 월요일에 해야 될 것 같은데"


"A/S센터 오늘도 할 텐데?"


또 추궁하듯이 얘기했다.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남편이 처음 보는 내 태도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얘기하고는 마음이 아팠다.


"엘리베이터 안이라서 조금 있다가 전화할게"


"응"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팠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에어컨 기사분들이 있어서 꾹꾹 참았다. 감정이 요동쳤고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감정 노트를 펴서 느껴지는 감정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아서 답답했음

- 드디어 통화 연결이 됐는데 거절해서 서운함

- 혼자 있는데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2시간째 있어서 불편함

- 건조기를 빨리 고쳐야 한다는 조급함

- 집을 잘 정리해서 빨리 정착하고 싶은 마음

- 이사 후 집안 정리 및 관리를 나만 하는 것 같은 억울함

- 어제 버리겠다던 쓰레기를 안 버림. A/S센터에 전화 안 함, 남편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 같아서 실망함

- 카페에 가서 내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해서 속상함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는 성격이 아닌데 오늘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건 계속 의문이었지만 호르몬 탓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 뒤, 남편과 통화를 하는데 바빠서 길게는 못했다. 마음에 둘 다 상처가 났는데 잠깐 밴드로 덮어 놓았다. 서로 미안하다며 얘기를 하고 이런저런 각자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도배 업체까지 집에 왔다 갔다.

드디어 자유가 되었고 펑펑 울고 싶었다. 일단은 광주 친정엄마 집에 늦지 않도록 출발했다. 운전을 하고 가는 길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엉엉 울었다. 운전을 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계속 눈물이 났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가 남편에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는지. 남편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함께 한 시간이 3년이 되어가도록 추궁하는 말투로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도 나도.

서로 더 배려하려고 했고 상대방이 행복한 게 나의 행복이었다. 탓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우리 부부의 관계에 내가 흠집을 낸 기분이었다. 남편에게 너무 미안했고 못난 내 모습이 속상했다.




다행히 잠깐 붙여 놓은 밴드는 상처를 아물게 하고 있었다.

저녁 11시쯤 남편은 서울에서, 나는 광주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이야기했다.


남편에게 따져 묻듯 얘기했던 말투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남편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니 그래야 했다. 만약 남편이 나에게 똑같이 그런 말투로 얘기했다면 엄청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남편이 먼저 혼자 집안일을 다 처리하도록 둬서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고마웠다. 마음이 편해졌다.

남편은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괜히 예민하게 생각하나 싶었다. 그렇게 그냥 넘어갔다.


우리 사이에 투명한 벽이 있는 느낌이었다. 오빠도 나도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다음 날, 다행히 둘 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전주에 온 기념으로 비빔밥을 먹으러 갔다. 예쁜 카페에 가서 사진도 찍었다. 평소와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는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광주에서 있었던 재밌는 얘기를 쏟아냈다. 친오빠와 새언니의 가사 분담 이야기였다.

남편이 내게 물었다.


"여보. 혹시 내가 더 집안일을 챙겼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


"아니. 우리 가사분담 잘 돼있잖아. 이제 식기세척기도 사서 별로 할 일 없을 것 같아. 오빠 저기 저렇게 뭐 사 먹고 들어와서 생긴 쓰레기들만 잘 처리해주면 돼"


"하하 알겠어. 어제는 이사랑 임장 리더 하는 일이랑 강의랑 큰일이 겹쳐서 내가 많이 못 도와줬지. 미안해 여보"


"아니야, 괜찮아 오빠. 나도 오빠가 임장 리더 하느라고 그렇게 바쁜 줄 몰랐어. 오빠가 직접 운전하면서 다니는 줄도 몰랐네. 상황을 좀 잘 알았으면 더 많이 이해했을 텐데"


"아니야. 이사 때문에 바빠서 설명을 충분히 못해줬었어. 이사만 없었으면 자세히 이야기해줬을텐테"


문득 지금 오빠에게 미안한 내 마음을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나 사실 오빠한테 진심으로 미안해"


"뭐가?"


"내가 어제 전화해서 오빠한테 따지듯이 얘기했던 거. 건조기 A/S 센터에 전화했냐며.

내가 그런 말투로 이야기한 거 처음이었잖아. 오빠 많이 놀랬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또 눈물이 흘렀다.


"아~응. 맞아. 여보 그렇게 얘기한 거 처음이었어. 좀 놀랬어.

건조기 빨리 고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했어"


"미안해ㅠㅠ 나 오빠한테 미안해서 광주 가면서 엄청 울었어. 그리고 내가 우리 사이에 흠집을 낸 것 같아서 더 속상했어"


남편이 와서 안아줬다.


"에이~아니야. 난 별로 상처 안 받았어. 우리 사이에 흠집 전혀 안 났어. 여보가 워낙 나를 잘 떠받들어 주니까 항상 행복해. 은영 누나랑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얘기하잖아. 빛나가 진짜 진일이 떠받들고 산다고. 우리 여보 최고야(엄지 척) 최고야 최고!"


"아~ 뭐야ㅠㅠ 내가 우리 오빠 항상 떠받들려고 하긴 하지. 오빠가 그만큼 잘하니까 그렇지.

진짜 미안해 오빠. 나 정말 너무 속상했어. 막 마음이 미어지는 거야ㅠㅠ"


"그랬어? 그랬구나. 괜찮아. 우리 여보 최고야"


내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역시나 남편도 바로 알아 들었다. 둘 다 놀랬던 마음이 똑같았던 것 같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서야 드디어 예전처럼 진심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잠깐 붙여놨던 밴드를 떼어보니, 딱지가 져있었고 그것마저 잘 떨어진 기분이었다. 새살이 잘 자리 잡은 것 같다.


말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다를 수가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실수했던 나의 말투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면 서로 더 잘 이해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남편 마음이 상하면 내 마음은 더 상한다는 걸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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