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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사유 Jul 01. 2020

나는 내가 솔직한 사람인 줄 알았다

과연 나는 누굴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공부방에서 열심히 숙제를 하고 있을 때, 나보다 한 살 어린 공부방 동생이 본인은 쌩쌩이 줄넘기를 열 개는 족히 한다고 으스대며 얘기했다. 그때 그 동생의 나이는 8살, 내가 9살이었다. 어린아이가 무슨 꼰대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줄넘기를 챙겨 동생을 공부방 주차장으로 끌고 나갔다. 자 쌩쌩이 열 번 해봐. 동생은 줄넘기를 손에 쥔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더니 - 형 미안해요... 쌩쌩이를 두 개도 채 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 전에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누군가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각자의 연애사가 잠깐 화두에 올랐다. 그러다 내게로 관심이 모여 떠나간 사람에 대한 얘기를 잠깐 꺼냈는데,  친한 형이 내게 물었다.


  "지금 여기서 그 사람 얘기하는 거, 죄책감이 들지는 않아?"

  

  어, 지금 뭐 하는 거지? 나는 질문을 받고는 내가 몹쓸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 잠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겁디 무거운 이별 이야기를 가볍게 떠들어대서는 아니었다. '제가 잘못했죠'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나를 참회하는 남주인공 A로 두고, 떠나간 이를 비련의 여주인공 B로 두고는 말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 이별 챕터를 담당하는 전기수가 되고자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샌가 정돈되지 않은 사건들을 듣기 좋게 이어 붙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던 얘기를 마저 마무리지었다.


  죄책감이 없냐는 물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건, 나 스스로도 과거를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나는 과거를 이야기하며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죄책감을 느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불거렸다.


  여기서 코끼리 등에 올라타 본 적 있는 사람! 저요 선생님!

  귀신이 진짜 있을까? 나 본 적 있어!

  나 얼마 전에 연예인 봤다? 나는 중국집에서 강타 밥 먹는 거 봤어!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내뱉은 거짓말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이 내 거짓말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사건'에서 '감정'으로 거짓말의 방향을 틀었다. 지나간 사건은 바뀌지 않지만,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히 왜곡되고 과장되고 그러다 잊혀지는 거라,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지금은 어때? 그때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이제는 어때? 그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힘들어.

  사랑한다. 저도 사랑해요.


  감정을 속이는 일은 살아있는 제물을 필요로 한다. 추억을 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경건치 못한 제사를 위한 제물. 그들은 나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느꼈을 이들이다. 그러나 모두의 앞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나는 그들과의 추억을 난도질해 제단 위에 올린다. 여기서 내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소중한 이들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이고,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멋대로 추억을 불태우면 모든 걸 잃는 건 나밖에 없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알면서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건이 내게 찾아온다. 그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가 되고, 선별된 몇몇 과거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추억이 쌓여가는 것과 달리 공허는 계속 깊어지고 있다. 분명 나의 거짓말이 '사건'에서 '감정'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상은 어느새 '남'에게서 '나'에게로 전도돼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계속되는 나의 뭉근한 거짓말.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계속되는 혼잣말. 며칠 지나면 나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지 않을까. 어쩌면 아름다운 추억을 위해 나를 제단 위에 올리고 만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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