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많은 연애의 한심한 결말
밥값은 6000원, 커피값은 5000원, 맥주값은 4000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맥주만 마셨다.
가난을 숨기고 보니 나는 술밖에 모르는 남자, 그녀는 사랑에 금방 질리는 여자일 뿐이었다.
전역 후, 학교 사람들과 갖는 첫 술자리였다. 옆에 앉아있던 동생의 도움으로 내 얘기를 조금씩 풀어나갔고 다들 재밌게 들어줬다. 웃음꽃은 아니어도 싹 정도는 피웠을 것이다. 특히 왼쪽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가 정말 많이 웃었다. 나는 내 얘기를 짧게 마무리 짓고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복학생의 도리를 다 했던 것 같다.
2차는 없었다. 별 탈 없이 술자리가 끝났고, 집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누워 잠을 자려는데 왼쪽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교정기가 보이지 않게 입을 가리고 웃던 모습. 살면서 예쁘다는 생각보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한 적이 있었을까.
그 뒤로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고 싶어 그녀에게 과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고맙다는 이유로 약속을 잡았다. 강의가 끝날 시간에는 강의실 앞을 서성거리며 우연의 이름을 빌려 그녀의 얼굴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흘렀다. 새벽 3시, 집에서 잠을 자는데 그녀의 친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많이 취해서 나를 찾으니 와줬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도 내게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행복한 며칠을 보냈다.
그날은 정말 미안했다며 밥을 사겠다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밥 대신 술을 사달라고 했고, 그녀가 흔쾌히 승낙했다. 술값만 8만 원을 웃돌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서로 맥주만 홀짝거린 탓이었다.
해가 뜰 때 즈음, 그녀와 나는 자취방 옥탑에 마주서 있었다. 나는 의미 없는 사족을 붙여가며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의 접점은 내가 아닌 그녀의 결과물이었다. 그녀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와의 만남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이다.
당시 형편이 넉넉지 못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게 데이트의 전부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마냥 즐거웠다. 내 웃음을 보면 그녀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우리는 마주 보면 웃었고, 나란히 서면 마주 볼 곳을 찾아다녔다.
아쉽게도 웃음은 금방 그쳤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만남이 과제 같다는 말을 했다. 너는 왜 내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는 것이며, 약속은 항상 내가 잡아야만 하는 것인가. 너무 말이 없어서 너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돈이 없어서 먼저 약속을 잡기 부담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녀의 눈을 보며 그 모든 얘기를 뱉어놓고 헤어지자는 말은 전화로 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어서 친구의 돈으로 산 아이스크림을 들고 그녀를 찾아갔고, 화장품을 선물하고 나니 돈이 모자라 밥 대신 맥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매번 염치없는 전화를 돌리면서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월세를 내지 않을 거면 방을 빼라는 집주인 때문에 일하던 곳에서 가불을 받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그녀가 미웠다.
미련했다. 연애의 시작이 서로를 닮았던 만큼, 연애의 끝 또한 닮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남자친구를 보고 싶은데 빈손이라 차마 갈 수가 없어."
내가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찍겠다고 열을 올릴 때 그녀가 양손 가득 사들고 왔던 간식, 그녀가 샀던 밥과 선물. 그리고 그녀와 친구의 전화통화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의 고민이 나와 같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굶고 있을까 봐 그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내가 약속을 잡으면 그녀도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닮았던 만큼, 처지도 닮아 있었다.
우리는 가난한 만큼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변한 건 우리일 뿐, 사랑은 그대로라는 걸 알면서 왜 자꾸 진실을 외면하려 하는 것인가. 사랑이 식었다고 변명하며 관계를 포기하는 최악의 결말은 보고 싶지 않다.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가난을 이해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