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

누군가의 든든한 편이 된 다는 것.

by 꿈꾸는왕해

나는 한국 나이로 올해 마흔이다.

체감상 '마흔'이라고 했을 때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확 성숙해져야 할 것 같고, 뭐든 능숙하게 잘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


그런데 마흔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건, '엄마'가 되는 일이다.

'엄마는 아이에게 우주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실수도 많은 내가 누군가의 온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부담스럽다.


엄마가 이 세상에 한 명인 것처럼, 아이도 하나뿐이다.

그런데, 양육은 일처럼 피드백이 바로바로 오지 않는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도 바로 알 수가 없다.

나도 성장 중이기 때문에 그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의 모순점에 대해 발견한다.

나는 내 부모에게는 완벽을 바라면서, 정작 내 아이에게 ‘타협’을 가르친다.

“엄마는 이건 못해. 대신에 다른 건 정말 잘해.”라는 말로 아이를 포기시킨다.

내가 잘 못하는 건 공감, 잘하는 건 해결.

아이는 공감을 무척 중요시하는데, 그러한 감정은 해결책과 효율에 중점을 둔 내 방식과 충돌을 한다.


오늘, 아이가 학원을 다녀와서 평소 잘 맞지 않는 친구 얘기를 꺼냈다.
“엄마, 나 할 얘기 있어.”로 시작하는 말은 언제나 친구 이야기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시작되면, 히스테리처럼 스트레스가 치민다.

왜냐면, 아이는 잠깐 털어놓는 말이지만 몇 년 간에 걸친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고 있다.

공감을 원한다지만, 매번 공감만 하기에는 힘들다.


아이의 얘기가 시작되고 나는 머리가 바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지?

아이가 서운한 일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좀 치우쳐 판단하는 것 같으니 일단 들어보자.'라는 생각에

'어떤 상황이었지? 너는 뭘 하고 있었어?'취조하듯이 묻는다.

치우치지 않는 판단을 해서 바로 잡아주면 좋을 거라며, 몹시 해결로만 치우친 생각을 한다.


아이는 항상 마지막 문장에 진심을 드러낸다.
장황한 설명을 하다가 결국 말하는 건, 그 상황이 그냥 '서운했다'는 것이다.

’많이 서운했겠다. 짜증 났겠다 ‘등등 공감을 해주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몇 년째 듣는 나는 해결을 하고 싶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게 어떻게 해결이 되나, 내 일이 아니고,

아이가 스스로 돌파해야 할 문제들인데, 내 방법대로 아이에게 알려주면 나만 피곤한 거다.

내가 준 설루션은 팁이 될지 몰라도, 나의 판단이지 애한테 맞는 방법이 아닐 수 있다.

나는 이 오류를 받아들인다.


누군가 말로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제 내려놓아야 할 내 습성 같다.

오히려 "서운했겠다", "진짜 너 짜증 났겠다", "걔 왜 그래?"
이런 공감을 했을 때는 오히려 빨리 다음 상황으로 넘어갔다.


정작 아이가 듣고 싶었던 건, 그 순간에 자기가 느낀 마음에 대한 공감이었을 텐데,

나는 불편한 마음을 받아주면 되는데, 다음엔 이러지 말라고 해결 방법을 말하고 있으니 매번 어려웠던 것이다.

10년을 키우면 잘할 것 같지만 모자람이 많다.

다행인 건 아이는 약간은 자기중심적이지만 회복탄력성도 좋고, 본인의 몫을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아이 스스로 여물어갈 때까지, 친구 관계에서 어려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내가 즉각적인 반응하기보다는,

지지자의 태도로 기다려주는 편이 더 맞다고 본다.


어렵지만, 이제부터는 판단 없이 잘 들어 보자.

온전한 한편이 되는 거다.

다만, 치우치지 않고 스스로 정립이 잘 된 엄마로서 한편이 되는 거다.


나의 장점은 피드백을 잘한다는 것.

아이도 나도 같이 커 가면 된다.

엄마라는 것은, 아이가 존재하는 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존재 같다.

월,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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