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인간의 회복포인트
나는 ‘나는 저기, 숲이 되어 볼게’라는
최유리의 노래 가사를 좋아한다.
숲이 되어 누군가를 든든히 지켜주는 마음,
그게 이 노래가 가진 힘인 것 같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피톤치드가 온몸을 감싸고 내려와 지친 나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 같다.
남편은 머리를 많이 쓰는 일을 하는데,
심적으로 힘들 때면 숲을 찾는다.
수목원에 가기도 하고, 산에 오르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와 함께했는데, 처음엔 솔직히 즐겁지만은 않았다.
벌레도 많고, 날씨에 상관없이 걸어야 해서
더우면 덥다고 짜증이 나고,
추우면 추운데 왜 걷냐며 투덜거렸다.
겉으론 내색 안 하려 했지만… 아마 다 알았겠지.
어떤 마음으로 날 데리고 다녔을까.
이제 와 생각하면, 그는 참 산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변화가 생겼다 나도 숲을 좋아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니 같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걸까.
자연을 보는 시간이 좋다.
특히 요즘은 비 오는 날 수목원을 가장 좋아한다.
빗방울이 초록 잎에 맺히고,
그 물방울이 흐르는 걸 바라보며 걷는 데크길.
비가 많이 내릴 때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데
그 시간은 완전한 채움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을 봐야 충전이 되는 시스템 값이 설정된 게 아닐까?
과부하가 걸리면 자연이라는 회복 포인트에 가서
다시 충전을 하는 것.
게임처럼 녹색 포인트를 막 올리는 거다.
아날로그적인 삶이 편안한 것처럼, 자연에 가까울수록 몸도 마음도 한껏 가벼워진다.
사람이 힘들 때면 산이나 바다를 찾게 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 아닐까.
광활한 자연 앞에서는 지금의 걱정이 아주 작아진다.
바다는 나에게
“반복되는 일이야 별거 아니야. 그냥 툭 털어버려.”
하며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여준다
숲은 조용히 나를 감싸 안아준다.
“그래, 나처럼 고요해져 봐.” 하고 말해준다
인간은 결국 자연에게 위로받는다.
그러니까 ‘저기 숲’은, 곧 ‘자연’이겠지.
나는 내향형 인간이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하면
반드시 혼자만의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
잠깐 누워 있거나,
그래도 회복이 안 될 땐 밖에 나가 걷는다.
이게 내가 아는 나의 가장 빠른 충전법이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나는 자연에서 충전을 한다.
동네 가로수길을 걷거나, 하천을 따라 걷는다.
풀 냄새, 물비린내를 맡으며 내딛는다.
그러곤 “아, 곧 여름이 오겠다”는 생각을 한다.
털어내려 나간 건데,
어느새 에너지를 채워 돌아오고 있다.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들끓었던 감정도 가라앉는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아마도 좁아졌던 시야에서 벗어나
넓어진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해방감 때문 아닐까 싶다
도시에선 늘 좁은 공간 안에,
가까운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원치 않는 자극이 넘쳐난다.
그럴 때 나무를 멀리 바라보며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건, 인간의 기준이긴 하지만
말 그대로 자연 자체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편안한 거다.
나는 오늘,
‘숲’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