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호는 지하철이 정차하기 직전, 손목에 찬 단말기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단말기에 비친 얼굴은 어제와 같았다. 피로한 눈빛만이 그를 안심시켰다. 적어도 변하지 않은 건 자신뿐이었다. 다만 오늘 아침은 뭔가 달랐다. 평소와 다른 무거운 피로감. 마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감. 그는 이 감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수십 번 타왔던 지하철. 이제는 시간대별로 어느 칸에 어떤 사람들이 서 있을지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따라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다. 아니, 시선이 아니라 시선의 부재였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오늘은 마치 그가 투명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시선을 비켜갔다.
"죄송합니다," 그가 늘 마주치던 중년 여성의 가방에 팔꿈치가 부딪혔다. "괜찮아요." 여성은 그를 향해 미소지었지만, 시선은 정확히 그의 눈을 바라보는 대신 조금 옆으로 빗겨나갔다.
승호는 자신이 예민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무 프로젝트 마감이 다가왔고, 피로가 쌓였다. 어제도 늦게까지 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한 층의 기억이 흐릿하다는 사실을 떨쳐냈다. 분명 어제의 일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회의, 점심, 오후의 보고서, 야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지하철 문이 열렸다. 승호는 사람들 틈에 휩쓸려 익숙한 경로로 회사를 향해 걸었다. 건물 앞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출입증을 꺼내 게이트에 갖다 댔다.
삐빗.
적색등이 켜졌다. 승호는 의아함에 다시 한번 출입증을 대보았다.
삐빗.
"민승호 님이세요?" 경비가 다가와 물었다.
"네, 그런데요?"
"잠시만요." 경비는 자신의 단말기를 조작한 후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아, 특별 조치가 내려왔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승호는 영문을 모른 채 경비를 따라 로비의 한쪽으로 이동했다. 경비는 그에게 임시 출입증을 건네주었다.
"오늘만 사용하시고, 오후에 IT부서에서 새 출입증을 발급받으시기 바랍니다."
"출입증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경비는 미소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시스템상 일시적인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무실로 들어서자 여느 때와 같은 소음이 그를 맞이했다. 키보드 소리, 전화벨, 복사기의 윙윙거림, 수십 개의 목소리가 뒤섞인 일상의 백색소음. 동료들은 평소처럼 고개만 까닥이며 그의 출근을 맞이했다.
"승호씨, 늦으셨네요." 팀장 유민석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제 늦게까지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괜찮아요?"
"네, 별 문제 없습니다."
"타이밍 좋네요. 도현 씨가 방금 메일을 보냈는데, 샘플링 모델에 약간 문제가 생겼다고 해요. 잠시 후 회의실에서 만나요."
승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지만, 평소와 달리 암호를 두 번이나 잘못 입력했다. 세 번째에야 접속이 됐다.
이메일함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세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IT부서에서 온 것이었다.
〈시스템 프로필 업데이트 안내〉 귀하의 프로필이 자동 업데이트 예정입니다. 오후 2시까지 IT부서를 방문하여 최종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서명: 시스템 관리자
승호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자신의 부서 계정으로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그런데 평소 자신이 접근할 수 있던 파일들의 권한이 일부 제한되어 있었다. 오히려 새로운 폴더가 하나 더 생겨 있었다. '승인인원 관리체계'라는 제목의 폴더였다. 이런 류의 파일은 자신의 등급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그는 폴더를 클릭했다. 놀랍게도 접근이 가능했다. 누군가 부주의함의 흔적이었다.
안에는 회사 직원들의 명단과 상태가 정리된 파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민승호 (P-38921) / 상태: 활성 / 본체: 사망(2/25) / 특별 유지 조치: 승인됨
화면을 보는 승호의 손이 떨렸다. 그는 '본체: 사망'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야근을 마치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승호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현듯 승호는 자신이 집에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갑자기 다가오는 헤드라이트의 불빛. 그때 통증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잠깐, 이상했다. 그 횡단보도. 회사에서 그의 집까지는 횡단보도가 없었다. 그는 늘 지하철역을 통해 이동했고, 보행 브릿지를 이용했다. 그렇다면 왜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이 이토록 생생하게 떠오르는가? 그것은 꿈이었나? 하지만 그 장면은 너무도 선명했다. 차량의 광택, 빗방울 맺힌 아스팔트, 대기의 습기, 심지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의 질감까지. 아니, 이 근처는 아예 횡단보도라는 것 자체가 없는데...
승호는 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억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음 기억은 오늘 아침, 출근을 위해 일어난 순간뿐이었다.
화면을 더 내려보니 작은 메모가 있었다.
P-38921 의지체 특별 유지 대상. 본체 사망 후 고성능 검증됨. 복제 인위적 유도 없이 자연 발현된 고급 복제 패턴 확인. 신성사 내부 프로젝트로 지속 관찰 권장. 해당 개체에는 본체 사망 고지하지 말 것. (2/26 04:32)
승호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승호. 그의 이름은 승호였지만, 이 승호는 '본체'가 아니라 '의지체'라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는 자신이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에 있었다. 다만 어젯밤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을 뿐.
"승호 씨, 회의 시작합니다." 옆자리의 동료가 그를 불렀다.
승호는 흐릿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지금 갑니다."
회의실로 향하는 내내, 그는 방금 본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본체가 사망했다. 그는 의지체다.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을 예정이다. 그는 알아버렸다.
회의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그 모습이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를 경험했다. 마치 디지털 이미지가 깜빡이는 것처럼.
회의는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샘플링 모델의 오류를 해결하는 방안이 논의되었고, 새로운 프로젝트의 일정이 조정되었다. 승호는 기계적으로 자리에 앉아 메모를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들로 가득했다.
내가 나인가? 이 생각, 이 의식, 이 기억들은 진짜 내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에 실제 민승호의 육체가 누워있고, 그의 의식이 복제되어 지금 이곳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 육체는 이미 사망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의지체뿐. 의지체인 '나'는 무엇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데이터인가?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승호는 조용히 내부 메신저를 열었다. IT부서의 송상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상우는 승호와 대학 시절부터 알던 사이로, 다른 사람들보다 솔직한 편이었다.
[민승호] 상우 씨, 내 출입증에 문제가 생겼어요. 혹시 왜 그런지 알아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송상우] 어... 승호 씨 출입증은 특별 관리 대상으로 변경되었다고 들었어요. 오늘 오후에 새로 발급해드릴 예정이에요.
[민승호] 특별 관리 대상이라뇨?
상우의 응답이 늦어졌다. 타이핑을 시작했다가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메신저 창에 표시되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송상우] 자세한 건 몰라요. 다만 아까 인사팀에서 보안 코드를 변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승호 씨 상태를 'S-체계'로 전환하라고...
S-체계. 승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일반적인 조치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내부 메신저를 닫고, 그는 회사 내부 시스템에서 'S-체계'가 무엇인지 검색해보았다.
검색 결과는 없었다. 대신, 그의 화면에 작은 알림이 떴다.
〈제한된 검색어입니다. 해당 검색은 기록되었습니다.〉
승호는 갑자기 자신이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컴퓨터 화면을 끄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근 후, 그는 자신의 특별한 업무성과의 비밀무기인 비인가 개인 단말기를 꺼내 'S-체계'와 '의지체'에 대해 검색했다.
'의지체'에 대한 검색 결과는 공개 정보였다. 물질계 인간의 의식을 복제하여 공단계에서 근무하게 하는 기술. 본체에게 급여가 지급되며, 의지체는 시스템상 '사물'로 분류됨. 본체 사망 시 의지체는 삭제 대상.
마지막 문장에서 승호의 심장이 뛰었다. 아니, 심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본체 사망 시 의지체는 삭제 대상. 그렇다면 그는 지금 삭제되어야 할 존재라는 말인가? 그런데 회사는 그를 '특별 유지 대상'으로 분류했다. 왜?
"민승호 씨?" 문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인사팀의 목소리였다.
승호는 단말기를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네?"
"IT부서에 가셔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인사팀 직원을 따라 세 층을 내려가, 평소 출입이 제한된 구역으로 들어갔다. 투명 유리문이 앞에 나타났고, 문 너머에는 여러 대의 대형 컴퓨터와 나란히 놓인 기계들이 보였다. 승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의지체 유지 시스템. 의지체들의 데이터가 저장되고 관리되는 곳이었다.
유리벽 너머로 몇몇 기술자들이 광학 케이블과 서버 랙 사이를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단말기를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갑자기 승호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승호는 그 기술자의 단말기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떠 있는 것을 순간적으로 목격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우가 그를 맞이했다.
"승호 씨, 잘 왔어요. 출입증 발급해 드릴게요."
상우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인사팀 직원은 그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승호와 상우만 남자, 상우는 주변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갑자기 모든 관리자들이 승호 씨 계정 권한을 변경하고 있어요. 오전 내내 비상 회의가 있었다고요."
"상우 씨, 솔직히 말해줘요. 내가... 내가 의지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상우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부 데이터베이스에서 봤어요. 내 본체가 어제 사망했다고..."
상우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였어요. 횡단보도에서... 회사는 오늘 아침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데 왜 나를 삭제하지 않는 거죠? 규정상 본체 사망 시 의지체는 삭제되어야 하잖아요."
상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회사가 승호 씨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어요. 상부에서는 승호 씨의 업무 효율이 너무 높다고 판단했대요. 게다가 보통의 의지체와 달리, 승호 씨는 자연발현된 고급 복제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연구 대상이 된 거죠."
"연구 대상..." 승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건 비밀이에요. 저도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승호 씨가 친구니까. 하지만 이미 당신이 알아버렸으니,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면 안 돼요. 회사는 당신을 삭제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내가 진짜 민승호가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생각과 감정이 진짜가 아니라고 느껴져요?"
승호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승호라고 느꼈다. 모든 기억, 감정, 생각이 그의 것이었다. 어제 저녁 이후의 기억이 흐릿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완벽하게 자신이었다.
상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승호 씨, 솔직히... 저도 이 상황이 윤리적으로 맞는지 모르겠어요. 회사는 이익만 생각하죠. 당신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니까,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유지하기로 한 거예요. 하지만..."
상우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이건 당신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유용한 도구로 보는 거죠. 회사는 늘 그래왔어요. 사람들을 소모품처럼 대하는..."
상우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는 무언가 기억이 난 듯 화제를 바꿨다.
"그렇다면 당신은 승호예요. 다만... 다른 형태의 승호일 뿐이죠." 상우가 공식적인 어조로 말했다. "자, 이제 새 출입증을 드릴게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회사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요."
승호는 새 출입증을 받아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에 쥐고 있는 플라스틱 카드는 이전 것과 동일해 보였지만, 뒷면의 바코드 패턴이 달랐다. 그는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카드가 그의 새로운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인간 민승호가 아닌, 'S-체계' 의지체로서의 승호.
자리에 앉자마자, 팀장 유민석이 다가왔다. 승호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경계? 호기심? 아니면 약간의 죄책감?
"승호 씨, 제가 지금 긴급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나요? 당신이 작성한 전분기 보고서 형식이 정말 좋았거든요."
팀장의 말투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마치 미리 연습한 것처럼.
승호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실존적 위기와는 별개로, 여전히 회사의 업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물어보고 싶었다. '팀장님, 제가 의지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제 본체가 어제 사망했다는 것을 아시나요?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평소처럼 대하는 게 괜찮은 거죠?' 하지만 그 질문은 그의 입술 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네, 도와드리겠습니다." 결국 그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팀장의 표정에 찰나의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오후 내내 승호는 기계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메일에 답장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질문들이 맴돌았다.
내가 나라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육체 없이 의식만 존재할 수 있는가? 의지체가 삭제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죽은 존재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인가?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습관적으로 식판을 들었지만, 기분탓인지 의지체가 그런 것인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 어제도 식사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동료들 사이에 섞여 식사했다.
"승호 씨, 괜찮아요?" 옆자리의 이지현이 물었다. "좀 창백해 보여요."
"아, 네. 그냥 약간 피곤해서요."
"어제 늦게까지 일했다면서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승호는 잠시 지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의지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모두가 그를 여전히 '진짜' 민승호로 생각하고 있을까?
"지현 씨, 만약... 만약 내가 내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지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철학적인 질문인가요?"
"아니... 그냥 문득 든 생각이에요. 우리가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가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 않나요?"
지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저도 가끔 그런 생각 해요. 마치 우리가 회사의 부품이 된 것처럼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잖아요. 퇴근하면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거죠."
승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퇴근해도 돌아갈 '진짜 자신'이 없었다. 그의 본체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퇴근. 그리고 내일도 출근이다. 일단 지금 파트 업무가 긴급하니까. 나머지는 그걸 끝내고 생각해야 했다.
오후 다섯 시, 승호는 복도에서 회사 간부들과 몇몇 낯선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직감적으로 그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그 중 몇몇은 그의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회의실 옆을 지나가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들었다.
"...민승호의 의지체는 특별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발현 복제 패턴을 더 연구해야..."
승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를 유지하기로 했는지, 앞으로 그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가 정말 '사람'인지 아니면 단지 데이터의 조합인지.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단말기가 울렸다. 새 메시지였다.
〈긴급: 샘플링 모델 최종 수정 필요. 오늘 클라이언트 미팅 전까지 완료 요망.〉
승호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오후 5시 30분. 클라이언트 미팅은 7시. 게다가 그 모델은 그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그만이 수정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일단 이 업무부터 마무리하고, 그 후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자. 어차피 지금 당장 진실을 알아봤자 업무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책상으로 돌아와 승호는 샘플링 모델 수정에 몰두했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동안, 그는 잠시 자신이 의지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수식과 코드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능숙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최소한 그 부분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모델 수정을 마치고 승호는 시계를 보았다. 6시 45분. 회의 시간까지 15분 남았다. 그는 결과물을 팀장에게 전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면... 그냥 이대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회사는 그를 삭제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계속해서 민승호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진짜 민승호는 아니지만, 그의 모든 기억과 경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
하지만 그것이 옳은가? 규정에 따르면 그는 삭제되어야 한다. 본체가 사망했으니, 그의 의지체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회사는 그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지하고 있다. 그는 단지 비용 효율적인 자원일 뿐인가?
승호는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액자가 있었다. 그의 가족 사진이었다. 부모님과 자신. 이제 그들에게 민승호는 죽은 아들이다. 하지만 여기, 이 회사에는 여전히 민승호가 존재한다. 그 불일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순간 액자 속 가족 사진을 바라보면서, 승호는 깨달았다. 회사는 그의 의지체를 유지함으로써, 단지 효율적인 직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시키고, 그 데이터를 통제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 있었다. 그는 원본이 파괴된 후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기계와 다름없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을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는 의지체의 권리는?
"승호 씨, 미팅 시간이에요." 팀장이 그의 책상 앞에 나타났다. 팀장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약간의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승호가 답했다. 그는 서랍을 닫고 가족 사진을 다시 숨겼다.
그는 팀장을 따라 회의실로 걸어갔다. 회의실 문을 열며,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목에 찬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의 얼굴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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