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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화. 모세의 태블릿과 아이패드

모든 것은 재활용된다

by 김동은WhtDr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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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을 만든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백지 위에 전혀 없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마법, 들어본 적 없는 언어, 획기적인 종족을 만들어야만 '독창적인 세계관'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창작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롭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사실 과거의 파편들을 다시 조합하고, 재해석하고, 새로운 맥락을 부여한 것에 불과합니다. 창작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유(有)를 재활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입히는 작업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흥미롭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태블릿(Tablet)'이라는 단어입니다.


같은 단어, 완전히 다른 세계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 중 누군가는 아이패드나 갤럭시탭 같은 태블릿 PC를 들고 계실 겁니다. 우리는 이 얇고 매끈한 유리 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태블릿'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익숙한 단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인류 기록의 시초와 마주하게 됩니다.


라틴어 '타불라(Tabula)'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고대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새겼던 돌판(Stone Tablet)이었고, 로마 시대에는 왁스를 칠해 글을 썼다 지웠다 하던 왁스 태블릿(Wax Tablet)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그 돌판과 나무판은 최첨단 디지털 스크린으로 모습을 바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망치와 정으로 글자를 새기던 돌덩어리와, 손가락 터치로 전 세계의 정보에 접속하는 디지털 기기 사이에는 엄청난 기술적 간극이 존재합니다. 재질도, 기능도, 작동 원리도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서양 문명은 이 새로운 디지털 기기에 여전히 '태블릿'이라는 오래된 이름을 붙였습니다.


만약 이 기기를 처음 세상에 내놓으며 "터치형 휴대용 평면 컴퓨터" 같은 기술적 신조어를 붙였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사람들은 이 낯선 물건의 용도를 이해하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태블릿'이라고 부르는 순간,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가 깨어납니다.

"아, 판판한 판 위에 무언가를 쓰고 정보를 담는 도구구나."


형태는 변했지만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판'이라는 원형적 이미지가, 낯선 디지털 기기의 정체성을 순식간에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글자는 계승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져 매우 긴 시간을 지나도 복합적인 의미를 전하는 타로카드를 생각해보세요.


키워드는 중립적이지만, 연결망은 세계관이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태블릿"이라는 단어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이 단어는 그저 "평평한 판"을 의미할 뿐, 그 자체로는 신성함도, 첨단성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어떤 다른 단어들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 펼쳐집니다.


모세의 태블릿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돌로 만들어졌고, 십계명이 새겨져 있으며, 신과의 계약을 상징하고, 영구적이며, 불변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한 번 새겨지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 깨지기는 해도 수정할 수 없는 것.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입니다.


반면 아이패드는 어떻습니까? 유리로 만들어졌고, 앱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클라우드와 연결되어 있고, 수시로 업데이트되며, 일시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터치 한 번으로 지워지고 다시 쓰이는 가변성. 즐거움과 편리함의 도구입니다.


같은 "태블릿"이지만, 모세의 태블릿은 [돌], [십계명], [신], [영구성]과 연결되고, 아이패드는 [유리], [앱], [업데이트], [일시성]과 연결됩니다. 이 연결망의 차이가 곧 세계관의 차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키워드 클라우드'라고 부릅니다. 단어 하나하나(키워드)는 중립적이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클라우드)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연결의 강도가 의미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키워드의 재활용'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문화와 언어, 즉 '키워드'를 빌려오지 않으면 지금 우리 손에 든 물건조차 제대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과거의 키워드를 현재의 기술과 맥락에 맞춰 갱신하며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단어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 그 연결의 강도가 세계관을 만듭니다.

화폐가 국가의 보증으로 가치를 갖듯, 특정 단어나 상징이 커뮤니티의 합의를 통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힘. 저는 이것을 '신용(Credit)'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단어를 들었을 때 긴 설명 없이도 같은 맥락을 이해하는 정도, 즉 '소통의 효율성'이자 '믿음의 크기'입니다.


키워드의 유한성: 우리는 한정된 벽돌을 쓴다

창작자가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단어(키워드)는 생각보다 유한합니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거의 없습니다.


'사랑', '배신', '복수', '희망' 같은 감정의 단어들. '칼', '방패', '마법', '우주선' 같은 도구의 단어들. 인류 문명 중 가장 많은 문헌을 가진 영어의 옥스퍼드 사전도 약 60만 단어입니다. 전 세계 모든 언어를 합쳐도 아마 1천만 단어를 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도 같은 의미의 단어군(mother, mère, madre, 母, 어머니)을 묶으면 그 수는 훨씬 줄어듭니다.


우리는 이 한정된 단어의 블록들을 가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집을 짓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실력은 어디서 갈릴까요? 남들이 안 쓰는 희귀한 블록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닙니다. 누구나 아는 흔한 블록(키워드)에 '나만의 연결망'을 만드는 능력입니다.


스타워즈: 기사 + 우주 = 제다이

<스타워즈>를 보십시오. 조지 루카스는 '기사'라는 중세의 단어를 가져와 우주적 영웅인 '제다이 기사'를 만들었습니다. '검'이라는 단어에 빛을 더해 '광선검'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없는 단어를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기사의 이미지(충성, 명예, 검술)를 우주라는 공간으로 옮겨와 재활용했습니다.


중세 기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검, 갑옷, 왕에 대한 충성, 명예, 결투. 이제 제다이 기사를 보십시오. 광선검, 로브, 공화국에 대한 충성, 명예, 결투. 연결망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 단지 몇 개의 키워드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덕분에 관객들은 제다이라는 낯선 존재를 보자마자 "아, 저들은 우주의 사무라이 혹은 성기사 같은 존재구나"라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족 서사를 더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화해, 유산의 계승. 이것은 인류가 수천 년간 이야기해 온 보편적 주제입니다. 루카스는 이 익숙한 키워드를 우주라는 낯선 배경에 이식했고, 그 결과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서사가 탄생했습니다.


이것이 세계관 설계의 핵심입니다. 낯선 세계를 소개할 때, 대중이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키워드(인접 세계관)를 징검다리로 놓아주는 것. 그리고 그 키워드 위에 우리 세계만의 독특한 연결망을 입히는 것.


시간성과 위치성: 같은 단어, 다른 의미

키워드 클라우드를 재구성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키워드에는 '시간성'과 '위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돌판 태블릿과 2024년의 디지털 태블릿은 같은 단어지만, 그 안에 담긴 기술과 문화적 맥락(시간성)은 다릅니다.


또한 한국에서의 '용(龍)'과 서양에서의 '드래곤(Dragon)'은 같은 단어로 번역되지만, 그 연결망은 완전히 다릅니다(위치성). 한국의 용은 물을 다스리고, 하늘을 날며, 왕을 상징하고, 복을 가져오는 신성한 존재입니다. 숭배의 대상입니다.

반면 서양의 드래곤은 불을 뿜고, 동굴에 살며, 보물을 지키고, 악을 상징하는 괴물입니다. 영웅이 퇴치해야 할 대상입니다.


한국의 용은 [물], [하늘], [왕], [복], [신성]과 연결되지만, 서양의 드래곤은 [불], [동굴], [보물], [악], [괴물]과 연결됩니다. 같은 파충류 형태의 거대한 생명체를 가리키지만, 연결망이 정반대입니다.

세계관을 만든다는 것은 이 키워드의 시공간적 좌표를 재설정하는 일입니다.


"우리 세계관에서의 '뱀파이어'는 피를 빠는 괴물이 아니라, 채식을 하며 인간과 공존하려는 진화된 종족이다."

이렇게 기존 키워드(뱀파이어)를 가져오되, 그 연결망을 재설정함으로써 나만의 세계가 탄생합니다. 전통 뱀파이어는 [피], [밤], [죽음], [공포], [괴물]과 연결되지만, 재설정된 뱀파이어는 [채식], [밤], [진화], [공존], [이방인]과 연결됩니다. 키워드는 같지만(뱀파이어, 밤), 연결망이 바뀌면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라이브러리다

이 책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은 무엇이고, 마법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하며, 세계 지도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정리한 설정집이 아닙니다.

세계관은 라이브러리입니다.


도서관을 떠올려 보십시오. 도서관에는 공식적으로 출판된 책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연구 노트, 참고 자료, 신문 스크랩, 누군가 남긴 메모, 심지어 대출 기록까지 모두 도서관의 일부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모여 하나의 지식 생태계를 이룹니다.


세계관 라이브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타워즈를 생각해 봅시다. 조지 루카스가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참고했던 모든 자료 - 일본 사무라이 영화, 서부극의 문법,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제2차 세계대전 공중전 다큐멘터리, 나치 독일의 군복 디자인 - 이 모든 것이 스타워즈 세계관 라이브러리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후 팬들이 만든 위키피디아(Wookieepedia, 현재 22만 개의 키워드), 수백 권의 확장 우주 소설,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팬픽, 팬아트, 코스프레. 이 모든 것이 스타워즈라는 세계관 라이브러리에 축적됩니다.

공식과 비공식의 경계는 흐릿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제다이], [포스], [라이트세이버]라는 핵심 키워드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만의 사전을 만들어라.

그래서 세계관 작업의 첫걸음은 거창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의 사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계에서 '사랑'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마법'은 무엇인가? '영웅'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대해 기존의 사전적 정의가 아닌, 나만의 연결망을 만들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세계관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반 사전에서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관 사전에서 사랑은 어떻게 정의됩니까?


그렇게 옛날 사전처럼 무언가를 적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단어끼리 연결만 되어도 됩니다.


[사랑]이 [상실의 예감], [짧은 행복], [필연적 이별], [기억]과 연결된다면? "이 세계에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끝나지만, 그 기억만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이것이 키워드 클라우드입니다.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어떤 다른 키워드들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당신의 세계관에서 사랑의 의미가 정의됩니다.

옥스퍼드 사전의 60만 단어를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관에서 핵심이 되는 500개, 1,000개, 나아가 4,500개의 키워드를 선택하고, 그것들을 의미 있게 연결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가지게 됩니다.


스타워즈의 Wookieepedia가 22만 개 키워드에 도달하기까지 50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조지 루카스가 첫 영화를 만들 때는 아마 5,000개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나머지는 세계가 살아가며 스스로 채워갔습니다.


과거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

모세의 석판이든 로마의 왁스 태블릿이든, 그것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정보 단말기'였습니다. 그 오래된 개념이 오늘날 클라우드와 연결된 아이패드로 진화했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뻔한 클리셰가 싫어"라며 모든 것을 새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익숙한 과거의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여기, 우리의 맥락에 맞게 다시 연결하십시오.


과거에는 태블릿이 [돌], [십계명], [영구성]과 연결되었습니다. 현재에는 [유리], [앱], [일시성]과 연결됩니다. 미래에는? 50년 후, 100년 후에는 태블릿이 또 어떤 키워드들과 연결될까요? 그것은 미래의 창작자들이 결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재해석한 키워드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태블릿은 신의 계약이 될 수도, 내일 출시될 앱의 캔버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연결망을 설계하는 것이 세계관 구축입니다.


오래된 단어 하나가 새로운 기술과 만나 재해석될 때, 전 세계인의 손에 들린 태블릿처럼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이 재구성한 낡은 키워드의 연결망 하나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와 소통해야 할까요?


과거에는 그 대상이 '옆집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고, 같은 우물물을 마시고,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디지털 시대, 당신의 키워드 클라우드를 공유할 진짜 이웃은 누구일까요? 다음 화에서 우리는 육체에서 계정으로, 물리적 공간에서 디지털 영토로 이동한 인류의 새로운 이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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