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덕적 명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를 사는 창작자로서, 우리는 이 문장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봅시다. 과연 '내 몸'은 무엇이고, '이웃'은 누구입니까?
과거의 세상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명확했습니다. '내 몸'은 말 그대로 뼈와 살로 이루어진 물리적 육체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은 내 육체가 거주하는 집의 옆집 사람,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리적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운명 공동체임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 같은 우물을 마시고, 홍수가 나면 같이 대피하고, 전염병이 돌면 같이 앓아야 했습니다. 피지컬(Physical)한 로컬 공간이 곧 나의 세계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었습니다.
이 시절의 커뮤니티는 '나의 육체'를 중심으로 층층이 쌓여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속하는 가정, 자라면서 다니게 되는 학교, 돈을 벌기 위해 나가는 직장. 이 모든 커뮤니티의 공통점은 내 육체가 직접 그곳에 가야만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학생이 아니고, 회사에 출근하지 않으면 직장인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정체성(Persona)은 내 육체의 위치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인류는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부터 페이스북, 트위터로 이어진 SNS 혁명은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특히 2010년대 초반 아랍권을 휩쓸었던 '자스민 혁명'은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광장에 모일 수 없었던 사람들, 물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던 사람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대했습니다. 총칼로 육체를 가둘 수는 있어도, 디지털 신호로 연결된 그들의 의지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전 세계가 목격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몸과 이웃은 디지털 공간의 계정들이 엄연히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육체의 제약을 벗어나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영토에 커뮤니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방식의 '이웃'을 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SNS 타임라인은 무작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당신만의 세계관입니다.
트위터에서 당신이 팔로우하는 100명의 계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이돌 팬덤 계정, 콘서트 정보 계정, 굿즈샵 계정, 팬아트 작가 계정. 이 연결망이 당신의 "덕질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당신의 타임라인에는 콘서트 날짜, 신곡 발매 소식, 새로운 굿즈 정보, 팬들이 그린 아름다운 팬아트가 흐릅니다. 이것이 당신이 선택한 세계입니다.
반면 당신이 블록하거나 뮤트한 계정들은? 정치 논쟁 계정, 혐오 발언 계정, 스포일러 계정, 광고 봇. 이들은 당신 세계관의 밖입니다. 이들의 트윗은 당신의 타임라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당신 세계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들입니다.
01화에서 우리는 키워드 클라우드를 배웠습니다. 키워드들이 서로 연결되어 의미의 네트워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태블릿은 [돌], [십계명], [신], [영구성]으로 연결되고, 아이패드는 [유리], [앱], [클라우드], [일시성]으로 연결된다고요.
이제 이것을 SNS 계정에 적용해 봅시다. SNS의 팔로우 네트워크는 인간 버전의 키워드 클라우드입니다. 키워드가 계정이 되고, 연결 강도가 팔로우 관계의 긴밀함이 되며, 클라우드가 타임라인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관(당신의 타임라인)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매일 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갑니다.
온라인 카페 시대를 기억하십니까? 당시에는 "가입/탈퇴"라는 이분법만 있었습니다. 어떤 카페의 회원이거나, 아니거나. 중간은 없었습니다. 카페에 가입하면 모든 회원의 글이 다 보였고, 탈퇴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SNS는 다릅니다. SNS는 팔로우, 언팔, 뮤트, 블록이라는 연결 강도 조절이 가능합니다.
당신과 강하게 연결된 계정이 있습니다. 매일 소통하고, 알림을 켜두고, 친한 친구의 계정입니다. 이 사람의 모든 글이 즉시 내 타임라인 최상단에 나타납니다.
중간 연결도 있습니다. 가끔 리트윗하고 좋아요를 누르는, 같은 관심사를 가진 계정입니다. 타임라인에 보이지만 우선순위는 낮습니다.
약한 연결도 있습니다. 팔로우는 하지만 거의 보지 않는, 정보 제공용 계정입니다. 필요할 때만 프로필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단절도 있습니다. 뮤트하거나 블록한, 원하지 않는 계정입니다. 존재하지만 내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디지털 이전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관계 설정입니다. 물리적 세계에서는 옆집 사람을 "뮤트"할 수 없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을 "언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키워드 클라우드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세계관 창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과 강하게 연결된 키워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복수극의 주인공을 생각해 봅시다. 이 주인공은 [복수]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수가 [칼], [어둠], [고독]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랑]과는 약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과거], [상실]과만 연결됩니다. 주인공의 모든 행동은 복수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사랑은 과거의 일이며, 현재는 복수만 남았습니다.
반면 로맨스의 주인공은 어떻습니까? 이 주인공은 [사랑]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설렘], [고백], [갈등]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복수]와는 약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수는 [과거], [용서]와만 연결됩니다. 주인공의 모든 행동은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과거의 복수심은 사랑을 만나 용서로 변합니다.
같은 주인공, 같은 키워드([복수], [사랑])를 사용하지만, 어느 것을 강하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됩니다.
이것은 SNS에서 당신이 팔로우 관계를 조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복수] 계정을 강하게 팔로우하면 타임라인이 복수 관련 콘텐츠로 가득 차고, [사랑] 계정을 강하게 팔로우하면 타임라인이 사랑 관련 콘텐츠로 가득 찹니다. 타임라인(세계관)의 분위기는 당신이 선택한 연결 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디지털 세상에서의 '나'는 주민등록번호로 식별되지 않습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로 접속하는 '계정'이 곧 나입니다. 그런데 이 계정이라는 존재는 사용자의 디지털 적응도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디지털을 '도구'로만 사용하는 사람들의 계정은 여전히 오프라인 관계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 목록에 학교 동창, 직장 상사, 거래처 사장님, 동네 친구가 뒤섞여 있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들의 온라인 자아는 물리적 육체 하나에 묶여 있습니다. 하나의 계정이 하나의 통합된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반면, 디지털을 '생활 터전'으로 여기는 디지털 네이티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계정을 통해 '다중 자아'를 능숙하게 관리합니다.
아이돌을 덕질할 때는 트위터 계정으로 활동하며, 아이돌 관련 계정, 팬덤 계정, 콘서트 정보 계정만 팔로우합니다. 철저히 팬으로서의 자아만 드러냅니다. 이것이 그의 "덕질 세계관"입니다.
게임을 할 때는 디스코드 계정으로 접속해, 길드원 계정, 게임 공략 계정, 패치 노트 계정만 팔로우합니다. 길드원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것이 그의 "게임 세계관"입니다.
일상 친구들과는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으로 소통합니다. 친구들 계정, 일상 계정만 팔로우합니다. 이것이 그의 "일상 세계관"입니다.
이것을 두고 기성세대는 "자신을 숨기려 한다"거나 "익명성의 폐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숨는 게 아닙니다. 각각의 세계에 맞는 시민권을 적절하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아이돌 팬덤의 세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게임 길드 채팅방에서 회사 업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세계의 규칙을 깼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는 각 커뮤니티의 문법에 맞는 '페르소나'를 장착하기 위해 계정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디지털 세상에서 '내 몸'은 하나가 아닙니다. 내가 접속한 세계의 수만큼 나의 몸(계정)은 여러 개가 될 수 있으며, 각각의 계정은 독립적인 인격체처럼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웃'은 누구입니까?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 같은 해시태그를 쓰는 계정, 나와 같은 유튜버를 구독하는 계정, 나와 같은 게임 서버에 접속해 있는 계정이 내 이웃입니다.
#BTS 해시태그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 해시태그 아래에는 전 세계 수천만 ARMY 계정들이 모여 있습니다. 서울의 20대 여성, 뉴욕의 40대 남성, 도쿄의 10대 학생, 상파울루의 30대 직장인. 이들은 지구 반대편에 살아도, 나이가 30살 차이가 나도 상관없습니다. '공통된 키워드'와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하게 연결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연결은 임시적이라는 점입니다.
BTS가 활동을 중단하면? #BTS 해시태그 클라우드는 약해집니다. 새로운 아이돌이 등장하면? 일부 계정들은 다른 해시태그 클라우드로 이동합니다. #BTS 클라우드에 있던 계정이 활동 중단 후 #NewGroup 클라우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 커뮤니티의 특징입니다. 해시태그(키워드)를 중심으로 순간적으로 모였다가, 해시태그가 약해지면 흩어집니다. 마치 철새 떼처럼, 먹이(콘텐츠)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이웃들은 물리적 이웃보다 더 끈끈할 때가 많습니다.
오프라인에서는 "너 아직도 만화 보니?"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도 그 작품 인생작이야!"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해방감과 소속감은 엄청납니다.
오프라인 세계에서는 이해받지 못하는 취향 때문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세계에서는 같은 취향의 수천 명과 연결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그들은 그 세계관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정보를 나누고, 문화를 만듭니다. 팬아트를 그리고, 2차 창작을 하고, 밈(Meme)을 만들고, 자체 용어를 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키워드 클라우드가 만드는 커뮤니티의 힘입니다.
콘텐츠를 만드는 우리가 이 변화를 직시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우리의 타겟은 더 이상 '20대 서울 거주 직장인' 같은 인구통계학적 육체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정한 키워드 클라우드를 공유하는 계정들의 집합'을 찾아야 합니다.
구식 타겟팅은 이렇습니다. 20대 여성, 서울 거주, 대학생. 지리적이고 인구학적인 분류입니다.
하지만 신식 타겟팅은 다릅니다. [판타지 소설]과 [고양이 집사] 키워드를 공유하는 계정들. [K-POP]과 [로맨스 웹툰] 키워드를 공유하는 계정들. [게임]과 [애니메이션] 키워드를 공유하는 계정들. 키워드 클라우드 기반 분류입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면서 고양이 집사인 계정들"은 서울에도 있고, 부산에도 있고, 뉴욕에도 있습니다. 나이도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판타지]와 [고양이]라는 키워드 클라우드를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콘텐츠에 반응합니다.
이제 창작자의 일은 보이지 않는 취향의 지도를 그리는 것입니다.
[판타지] 클러스터를 생각해 봅시다. 그 안에는 [로맨스 판타지] 클러스터가 있고, 계정이 10만 개 정도 있으며, 주로 트위터와 카카오페이지에서 활동합니다. [다크 판타지] 클러스터도 있고, 계정이 5만 개 정도 있으며, 주로 레딧과 디스코드에서 활동합니다. [현대 판타지] 클러스터도 있고, 계정이 8만 개 정도 있으며, 주로 인스타그램과 네이버에서 활동합니다.
[고양이] 클러스터도 있습니다. 그 안에는 [고양이 사진], [고양이 육아], [고양이 만화] 같은 하위 클러스터가 있습니다.
이 지도에서 [판타지]와 [고양이]가 겹치는 영역을 찾으십시오. 그곳이 당신의 콘텐츠가 들어갈 디지털 영토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있는 플랫폼(트위터, 인스타그램, 디스코드)에 당신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여기가 당신들의 집입니다. 당신의 그 계정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세계를 준비했습니다."
이제 명확해집니다. 세계관을 만든다는 것은, SNS에서 나만의 타임라인을 큐레이션하듯, 어떤 키워드를 팔로우하고 어떤 키워드를 블록할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만드는 세계관에서 강하게 연결할 키워드를 정하십시오. [마법], [모험], [우정], [성장]. 약하게 연결할 키워드도 정하십시오. [로맨스], [정치]. 그리고 배제할 키워드도 정하십시오. [폭력], [혐오], [선정성].
이렇게 키워드의 연결 강도를 조절하면, 당신의 세계관(타임라인)이 만들어집니다.
[마법]과 [모험]을 강하게 연결하면 액션 판타지 분위기가 됩니다. [우정]과 [성장]을 강하게 연결하면 청춘 성장 서사가 됩니다. [폭력]과 [혐오]를 블록하면 전연령 안전한 콘텐츠가 됩니다.
당신의 세계관은 당신이 선택한 키워드 클라우드 그 자체입니다.
창작자 여러분, 사람(육체)을 모으려 하지 말고, 계정(자아)을 모으십시오.
한 사람이 여러 계정을 가진 시대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트위터 계정은 당신의 콘텐츠에 열광하지만 페이스북 계정은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어느 계정(자아)을 당신의 세계로 초대하느냐입니다.
그 계정들이 모여서 떠들고 놀 수 있는 '신용'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들의 타임라인에 당신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만드는 것. 이것이 디지털 온라인 커뮤니티와 결합된 세계관 기반의 창작입니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이웃들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는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공유된 키워드'입니다.
다음 화에서 우리는 "마늘과 곰"이라는 단 두 단어가 어떻게 한국인 전체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는지, 그리고 당신이 만든 키워드 조합이 어떻게 새로운 커뮤니티의 신용(Credit)이 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2025 김동은 WhtDrgon @ MEJEwork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