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12월,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를 죽였습니다.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모리아티 교수와 함께 떨어뜨렸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끝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런던 시민들이 검은 완장을 차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신문사에 항의 편지가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홈즈를 돌려달라." 2만 통이 넘는 편지가 코난 도일을 압박했습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8년 후, 코난 도일은 굴복했습니다. 1901년 <바스커빌의 사냥개>를 출간하면서 홈즈를 부활시켰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죽기 전 이야기"였지만, 1903년 <빈 집의 모험>에서 홈즈는 공식적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문학사에서 중요한 순간입니다. 독자가 작가보다 강해진 순간이었습니다.
코난 도일 이후 130년이 지났습니다. 독자의 권력은 더 강해졌을까요, 약해졌을까요?
웹소설과 웹툰 독자를 보십시오. 댓글창에 무엇을 쓰고 있습니까?
"주인공 왜 저렇게 행동해?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작가님, 이 캐릭터는 이렇게 안 나오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다음 화 전개 예상: 아마 A가 B한테..." "만약 주인공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이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참여 욕구(Participatory Desire)'입니다. 독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받아먹기만 하는 수동적 소비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야기에 개입하고 싶어하고, 선택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작가보다 캐릭터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코난 도일 시대에는 2만 통의 편지를 보내야 했습니다. 8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요? 댓글을 다는 순간, 작가가 읽습니다. 다음 화가 영향을 받습니다. 때로는 작가가 독자 의견에 따라 스토리를 수정합니다.
독자는 이미 이야기를 바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여전히 '활자 감옥'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웹소설과 웹툰은 무엇입니까? 텍스트와 그림입니다. 2차원 평면입니다. 독자는 스크롤하고, 읽고, 보고, 다음 화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강력한 매체입니다. 수백만 명이 매일 웹소설을 읽고 웹툰을 봅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선형성(Linearity)입니다.
작가가 정한 순서대로 읽습니다. 1화 → 2화 → 3화. A를 지나 B를 거쳐 C에 도달합니다. 주인공이 검사가 되는 장면을 봤다면, 마법사가 되는 평행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쓰지 않았으니까요.
독자는 "만약 그때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고 상상하지만, 그것은 머릿속에만 존재합니다. 텍스트는 변하지 않습니다.
둘째, 일방향성(One-way)입니다.
작가 → 독자로만 흐릅니다. 작가가 쓰고, 독자가 읽습니다. 독자는 댓글을 달 수 있지만, 그것이 캐릭터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아, 왜 그랬어?"라고 물어도, 주인공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활자 속에 갇혀 있습니다.
셋째, 정적(Static)입니다.
완결된 웹소설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100화에서 했던 말을 영원히 반복합니다. 새로운 대화는 생기지 않습니다. 독자가 1년 뒤에 다시 읽어도, 주인공은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은 선택을 합니다.
이것이 활자 감옥입니다. 텍스트와 그림은 강력하지만, '상호작용(Interaction)'이 없습니다. 독자는 보는 사람이지,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산업은 이 한계를 깨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카카오페이지가 '무빙툰'을 내놓았습니다. 웹툰 컷에 성우 더빙을 입히고, 약간의 움직임을 줬습니다. 효과음이 들립니다. 캐릭터의 눈이 깜빡입니다.
결과는요? 어중간했습니다. 만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 움직임은 줬지만, 여전히 '시청'입니다. 독자는 보기만 합니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대화할 수 없습니다.
인기 웹소설이 드라마가 됩니다. 활자가 영상이 되고, 상상 속 주인공이 배우의 얼굴을 얻습니다. 시각적으로 화려해집니다.
하지만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여전히 '관람'입니다. 스크롤 대신 재생 버튼을 누를 뿐, 독자(이제는 시청자)는 작가가 정한 이야기를 따라갈 뿐입니다.
웹툰 IP를 가져와서 게임을 만듭니다. "이제 주인공을 직접 조종할 수 있어!" 하지만 현실은요?
대부분의 웹툰 IP 게임은 기존 RPG 시스템에 캐릭터 스킨만 덮어씌운 것입니다. 원작에서 검술 천재였던 주인공이 게임에서는 "물약 10개를 모아오세요" 퀘스트를 수행합니다. 원작 팬들이 외칩니다. "캐붕(캐릭터 붕괴)이야! 내 주인공이 왜 여기서 심부름을 하고 있어?"
원작 줄거리를 따라가는 게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재현'일 뿐 '확장'이 아닙니다. 독자는 이미 아는 이야기를 게임으로 다시 경험할 뿐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모든 시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는 방식'을 바꿨을 뿐, '참여의 본질'은 바꾸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완전히 다른 산업을 봅니다. 테마파크입니다.
2022년, 디즈니는 플로리다에 '스타워즈: 갤럭틱 스타크루저'를 오픈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스타워즈 테마 호텔입니다. 하지만 본질은 전혀 달랐습니다.
투숙객은 2박 3일 동안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밀수업자, 저항군 스파이, 제국군 동조자. 그들은 호텔이 아니라 '우주선'에 탑승한 것입니다.
실시간으로 사건이 벌어집니다. 저항군이 비밀 회의를 엽니다. 투숙객은 참여할지 말지 선택합니다. 참여하면 제국군에게 추적당할 수 있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기회를 얻습니다. 모든 선택이 모바일 앱에 기록되고, 최종 엔딩 파티의 연출이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원작'입니다. 스타워즈 정사(Canon)는 변하지 않습니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여전히 데스 스타를 파괴했고, 다스 베이더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이것은 조지 루카스가 만든 확정된 역사입니다.
하지만 투숙객은 그 역사의 '틈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그곳에 있었다면?" 정사는 존중하되, 가능성은 열었습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머시브 서사(Immersive Narrative)'입니다. 원작 세계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참가자가 그 안에서 '거주'하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웹소설 독자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990년대, CD-ROM 시대에 FMV(Full Motion Video) 게임이 유행했습니다. 실사 영상을 찍어 놓고, 플레이어가 선택지를 누르면 다른 영상이 재생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곧 사라졌습니다. 왜일까요? 비용 대비 효율이 나쁘고, 선택지가 제한적이고, 게이머들이 "이건 게임이 아니라 영화잖아"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18년, 넷플릭스가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를 내놓으면서 FMV가 부활했습니다. 형식은 똑같았습니다. 영상을 보다가 선택지가 나오고, 선택에 따라 다른 영상이 재생됩니다. 왜 이번에는 성공했을까요?
첫째, '선택의 무게'입니다. 게임에서는 "세이브/로드"가 가능했습니다. 잘못 선택하면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밴더스내치는 드라마였습니다. 한 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둘째, '메타 서사'입니다. 밴더스내치는 "선택 자체"를 이야기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청자(플레이어)가 그 누군가입니다. 이야기와 상호작용이 하나로 녹아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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