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은WhtDrgon.210724#게임기획자하얀용
이 글은 <메타버스+사업=?>에서 연결되는 글로 많이 언급되지만 저마다 이야기가 다른 '메타버스'에 대해서 다른 영역의 결합을 통해 상상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글이다. 이번 편 공연예술은 여러 예술가분들을 모시고 진행한 21년 6월 12일 삼일로 창고극장의 <아트 앤 테크랩> 7회 차 강의의 원고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게임과 심리학이 주어진 주제였는데 여기서 심리학이란 무엇일까?
내가 아동심리상담 2급이 있지만 그건 민간자격증으로 대충 PPT 열몇 개 강의를 배운 것이라 게임기획용 교양과목일뿐 어디가서 심리학을 안다고 할 수준도, 남에게 가르칠 수준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 게임이 관객과 어떤 식으로 심리적 접근을 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좀 극단적이고도 편협한 말이지만 게임은 게이머의 심리를 기술적으로 건드리지 않는다. 단지 무릎 아래에서 기다릴 뿐이다.
죽이는 게임!이라는 찬사와 사람을 죽이는 게임이라는 오명과 허용된 살인이 가지는 의미.
강사 소개 겸, TRPG에 대해 권위에 호소라는 오류를 시도하려고 이 페이지를 넣었다.
TRPG는 수동으로 진행되는 게임으로서, 게임 기획자에게는 모든 자료가 문서 형태로 존재하는 보물창고이다.
JPG이다 보니 동영상이 없는데 아래 영상이다.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3x03의 내용이다. TRPG가 워낙 오래된(1975+) 물건이다 보니 1970년대 아이들 놀이 시대상에 자주 등장한다. 그때는 좀 뭐랄까 아웃사이더들 놀이였는데, 지금은 리더십과 교육적 효과, 사회성이 재주목받고 있다.
자. 이렇게 써놓은 것만으로 이미 당시의 청자들, 그리고 이 글의 독자는 탐정이 될 준비가 되어있고, 건물의 이미지, 사무실의 이미지가 잡혔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준비도 되어있을 수도 있고.
대충 이런 분위기?
아니면 이런 분위기던가?
자 여기서 내가 1920년대가 아니라 2020년, 서울로 바꿨다고 한다면?
이미지는 다시 바뀔 것이다. 1920년대 탐정사무소보다 약간 혼란이 올 수도 있다. 흥신소나 조폭 사무실을 떠올려버릴 수도 있겠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게임의 배경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때 떠올린 이미지들. 고객의 준비를 너무 크게 배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삽화나 설정의 키워드를 조절하여 맞춰놔야 한다.
자 여기서 내가 여러분 중 한 명은 '범인'이며 이 모든 탐정을 죽일 것이다! 라고 선언한다면, 자신이 범인이 될지와 함께 어떻게 이 모든 탐정들을 죽여버릴지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게임은 이렇게 누군가를 죽일 생각을 이토록 쉽게 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상이다. 가상세계에 가기위해서는 하나가 필요하다.
NPC : None Player Character 플레이어가 조종하지 않는 조연 캐릭터. 마스터 혹은 시스템이 관리함. 상점 주인 등.
자캐 : 자작 캐릭터. 오리지널 캐릭터란 뜻도 있으나 작가나 마스터가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
이 강연의 핵심 주제이다. '공연예술이 만일 게임으로부터 뭔가 배울 것을 찾으려 했다면...'
"게임에서 공연하면 죽는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연예술가들 앞에서 대뜸 강연 초입에 꺼내기엔 다소 도발적 주제였고, 어쩌면 모욕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위험한 진행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드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것이다. 게임의 주인공은 관객이지 진행자가 아니다. 자! 네 재주를 보여봐!라는 관람자의 자세와 '자 내가 어떤 멋진 것을 할 수 있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영화는 감정이입을 하지만 게임은 롤 플레이를 한다.
계속 공연을 하면 게이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가령 점프? 혹은 그만두기. 만일 죽일 수 있다면 학살을 시작할 것.
게임은 'SKIP 버튼'이 있다. 반드시 있다. 아무리 중요한 내용, 아무리 필수적인 정보라도 반드시 있다.
게임이 고객에게 맞아 죽거나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가진 재주이다. 고객은 게임 광고를 보고, 클릭을 하고, 다운을 받고, 설치를 하고, 실행을 해서, 로딩을 하고, 첫 타이틀을 보고, 캐릭터를 만들기까지 쉬지 않고 그만둔다. 정말로. 위에 열거한 과정에서 70%쯤의 유저가 도망가버리고 30%가 남아있으면 성공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게임은 계약이다. 계약은 상대방이 인정을 해야 하고, 인정을 하면 그때부터 서면의 작성에 관계없이 신성한 계약이 시작된다. 폭리이자, 사기도박 빚과 강도질은 범죄자가 재산을 빼앗는 것이 동일하지만 이 계약이라는 것의 동의 정도가 다르다. 이 동의를 받는다는 것은 서로가 동등한 위치이거나 계약을 맺으려 드는 쪽이 더 낮은 쪽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에게 수많은 예외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게임의 가장 큰 차이는 주관이 누구에게 있느냐이다. 허락받고 예술하지 않지만, 허락받지 않고 게임을 하게 할 수 없다.
게임은 유저의 행동이 아니라 '허락받은 공간'에서 사용자가 허락한 '캐릭터'의 행동을 제안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탐정이 되려고 했듯, 해적이, 범죄자가, 군인이, 스파이가 되어 사람을 죽여대는 것은 여러분이 타락해서가 아니다. 이를 착각하는 것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행위인 것이다.
즉, 게임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사용자'를 '캐릭터'로 바꿔놓아야한다.
이것이 팬덤,커뮤니티,플랫폼에서 세계관이 하는 가장 첫번째 목표가 된다.
칭찬은 맨 몸으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액션이다. 사용자를 칭찬할 필요는 없다. 이미 사용자는 아니까.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는 이 터무니없고도 낯뜨거운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용자는 강하지 않아고 캐릭터는 강하니까! 캐릭터는 칭찬 받을 자격이 있다. 세계를 구했기 때문이다.
즉, 공연예술에서도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고 칭찬을 해야한다. 하지만 무엇으로 칭찬할 것인가?
칭찬은 공정해야 당위가 생긴다. 코스티겐의 게임론에서는 이렇게 말해준다.
"자 당신의 선택은? 1.히틀러에게 침을 뱉는다. 2.적에게 굴복한다" 1번은 선택한 당신! 그레이트! 훌륭하십니다! 영국이여 영원하라?
뭐가 재미있나. 화자가 하고있는 개그쇼가 재미있을 순 있겠다. 세계가 나를 신경쓰지 않고, 작위에 있지 않는 동등함의 객관성. 신뢰감을 캐릭터가 '계약한 규칙'을 통해서 가지게 된다.
'인류의 95%가 실패한 문제' 라는 제목에 이끌려서 들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하하 바보들. 내가 풀어주지.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하하 이 바보들 이런 꼼수가 있는데! 바로 이 영역도 게임 기획의 설계영역이다.
공연예술이 만일 게임처럼 느껴져야 한다면 관객은 캐릭터를 가져야하고 규칙이나 도전을 제안받고 승낙해야 한다. 이제 나는 캐릭터가 되었으며 어떤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공연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될 것.
에란겔 다크투어 : https://www.youtube.com/watch?v=bxVCJVKH11o
메타버스 세계 내에서 극장을 만들고 캐릭터를 데려다가 의자에 앉히고 VR로 공연을 관람시키는 것이 메타버스의 공연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게임은 세계관을 허락받고, 그안에 캐릭터를 만들기를 권한 후 캐릭터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보상한다.
내가 예술가가 아니어서 무엇이 공연예술의 미래인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은,
사용자가 그 수준과 취향을 선택하며, 캐릭터를 통해서 원하는 방식으로 관람하기 때문에,
그들을 잡아둘 수 있는 것은 규칙과 도전과 세계관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것 하나는 여전히 확실하다. "게임 안에서 공연하면 죽는다."
그럼 어떻게 소통해야하나? 규칙과 세계관과 사용자의 역할.
강연 전체 원고 링크 : https://docs.google.com/presentation/d/1ilY3hsAMl6ZoEy7Xq9zqomgyvlCY3xPgksRCw0o8ATA/edit?usp=sharing
누드는 스치기만 해도 청소년 불가이고, 그게 만일 미성년자라면 즉시 구속감인데, 살인은 왜 허용이 되는가?
그것은 살인이 가상의 토템, 인셉션의 팽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인은 명백한 가상을 상징한다.
210724
김동은WhtDrgon.
#게임기획자하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