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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Jan 18. 2022

조금씩 천천히 일군 '힙지로'

청년들은 의외로 낡은 건물에서 꿈을 꾼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1960년대 세운상가를 설계하면서 종묘부터 남산까지 걷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세운·청계·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상가 양쪽에 날개처럼 달린 3층 높이 공중보행로를 계획했죠. 하지만 일부 구간을 짓지 못하면서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50여년 뒤, 서울시 세운상가 일대 재생사업이 '김수근의 꿈'을 되살렸습니다. 2017년 청계천 위로 세운상가와 청계·대림상가를 잇는 것부터 시작한 공중보행로 연결 사업은 현재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세운·청계·대림상가를 잇는 350m 보행로에선 독특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음향기기 수리업체와 철학전문 책방, 고무·실리콘 패킹업체와 카페·술집, 조명·전자기기 판매업체와 갤러리가 교차합니다. 맞은편 컨테이너 창업공간 '세운 메이커스 큐브'에선 제품·인쇄 디자이너들이 일합니다. 새 것과 오랜 것, 먹고살기 위한 것과 즐기기 위한 것이 뒤섞인 '힙지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9년 세운재정비촉진계획대로 세운상가나 을지로 일대를 일소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모습이죠.

하지만 유령이 최근 다시 출몰하고 있습니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이란 유령이요.


현 서울시장은 지난해 11월18일 "10년 전 계획대로만 실행했다면 서울은 상전벽해로 바뀌었을 것"이라며 자신이 완성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불러냈습니다. 그는 "세운지구를 보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종로, 청계천, 을지로, 퇴계로의 미래를 향한 계획을 내년 상반기까지 세우겠다"라고 했습니다.* 서울시는 현재 관련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도심 대규모 재개발 계획을 시사한 것이나 다름없죠.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이 대체 무엇인지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계획은 1980년대부터 꾸준히 나왔지만,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다른 개발계획과도 차원을 달리합니다. 많은 현실적 제약을 무시하면서 덩치만 무리하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강북지역의 개발 해법으로 한때 유행했던 이른바 '뉴타운' 방식을 따랐습니다. 도로와 필지 형태가 반듯하지 않은 지역을 대규모로 엮어 '통개발'하는 거죠. 대형 블록으로 구획한 개발을 통해 도로 등 기반시설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도시 경관에 통일감을 입힌다는 논리입니다. 이에 따라 2009년 세운지구를 3만~6만㎡ 규모의 8개 구역으로 나눴고, 2015년까지 재개발한다는 '과감한 계획'이 나왔습니다.

세운재정비촉진계획 조감도. 출처: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그 과정의 기록>(2009)

하지만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은 누가 발을 걸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엎어졌습니다. 대형 블록 내 복잡한 이해관계를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대형 재개발구역을 지정한 뒤 소유주끼리 갈등만 겪다 2003년 실효된 역사가 다시 반복됐습니다. 또 당시 세운상가 내 주택엔 방 하나씩을 점유해 지분을 주장하는 사례도 득실했습니다. 이런 상가 소유주들과 이웃한 정비구역 토지주들을 엮어 개발을 시도하면서 지분 다툼이 극심했죠. 애초 사업을 잘못 설계한 것입니다. 도시에는 정말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합니다. 총칼을 앞세우지 않고서야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가령, 공공(서울주택도시공사·SH)이 맡은 4구역(세운상가 동측)을 봅시다. 2004년 재개발에 착수했는데 18년이 지난 지금에야 낡은 건물들을 철거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아무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고 전제해도 개발이 완전히 끝나려면 4~5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실패를 거듭한 통개발의 역사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곳이죠.


결국, 서울시는 2014년 통개발 계획을 폐기하고 세운지구 정비구역을 8개에서 171개 중·소규모 구역으로 나눴습니다. 큰 한 조각을 한 번에 개발하는 게 아니라, 작은 여러 조각을 서서히 개발하도록 유도하자는 계획입니다. 실제로 세운지구에선 산발적으로 재개발이 이어졌습니다. 2019년 초 대림상가 남측에 들어선 '을지트윈타워'는 중·소규모 개발 전략이 통한 대표 사례로 꼽힙니다. 대우건설·BC카드 등 대기업 사옥이 입주하면서 근처 유동인구가 급속도로 늘었습니다.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가 '노포'와 청년들의 감성을 자극한 카페·술집, 그리고 기존 기계·공구·인쇄 등 산업체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 때문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때도 이쯤을 전후해서죠.


이처럼 굳이 도시를 깔끔하게 밀고 새로 짓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자본의 필요성에 따라 낡고 작은 건물은 새롭고 큰 건물로 대체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운지구에서는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구역에서도 현재 건설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여기엔 1~2인 가구에 적합한 주거시설도 대량 공급되는데, 그럼 유동인구가 더 늘면서 주변은 더욱 활성화될 것입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세운상가와 그 주변에서 '산업 생태계'를 형성해 온 기계·공구·제조·금속·전자·인쇄 등 업체 및 종사자들과 공존하면서 말이죠. 그게 바로 오늘날 '힙지로'입니다.

2021년 4월 세운상가 옥상에서 촬영한 청계상가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고층 건물이 을지트윈타워.

하지만 오래된 건물을 그냥 두면 도시가 슬럼화하는 건 아닐까요? 깨진 유리창이 있는 집 한 채를 방치하면 동네 전체가 범죄의 온상이 된다는 말처럼 말이죠. 그럴 수도 있지만 의외로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세운상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건물 등 오래된 물리적 환경의 보전은 의외로 도시에 새로운 내용을 촉진하는 조건이 되는 거죠.


서울시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에 따라 철거될 운명이었던 세운·청계·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상가를 결국 남기기로 하고, 2015년 재생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메이커 시티(Maker City)'를 내걸고 '장인(기술자)'과 '도심 제조업'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2021년 9월 <서울도시연구>에 게재된 길현기·구자훈의 논문 '도시재생사업의 신규입주업체 유형별 특성 및 거점시설 만족도의 영향요인에 대한 연구'를 보면, 세운·청계·대림상가에 자발적으로 입주한 업체는 2016년 8개에서 2020년 94개로 계속 늘었다고 합니다. 디자인·문화예술·식음료 등 청년 창업자·종사자가 주류인 업종이 절반을 넘습니다. 접근성 등 입지는 좋은데 임대료는 다른 도심부에 비해 저렴하기 때문이죠. 낙후된 환경이 되레 새로운 세대를 부른 셈입니다.


이들이 도심에 유입된 배경으로는 기존 '산업 생태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길현기·구자훈은 "초기엔 문화·예술, 식음료 등 새로운 업종이 입주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존 산업과 유사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디자인, 도소매 업종이 입주했다"며 "새 업종과 기존 업종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세운상가에서 이어지는 청계·대림상가 3층 공중보행로에 조명업체와 카페, 식당, 술집이 뒤섞인 풍경.

새 세대와 기존 산업의 네트워크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선 서울시가 세운상가에 조성한 창업공간 '메이커스 큐브'엔 청년이 주축인 제품·인쇄 디자인 스튜디오 등 17개 업체가 활동 중입니다. 세운상가 일대 산업과 연계한 사업 계획이 주요한 입주 조건입니다. 입주 경쟁률은 매번 10 대 1을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하네요. 이들의 디자인과 일대 기술력이 합쳐 제품 출시 등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보브 스튜디오(ABOVE studio)'**는 2020년 세운상가 내 기술자 류재용씨와 협력해 만든 블루투스 스피커 'KNOT, SOUND ABOVE'를 출시했습니다. 또 2021년엔 세운상가·세운지구 기술자들과 함께 작업한 'The FACADE OF The SNOW PAVILION'을 강남 파이낸스센터에 설치했습니다.


을지로 조명 유통업체와 디자이너들의 협업 체계를 구축한 브랜드 '아고(AGO)'도 있습니다. 이 브랜드는 '을지로에서 오랜 세월 숙련된 장인들과 협력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매장에 필요한 '키네틱(스스로 움직이는)' 설치품을 제작하기 위해 찾은 곳이 세운상가와 을지로입니다.


세운지구의 경우, 새 세대가 진입하면서 금속·인쇄·전자 등으로 업종 밀집지역을 구분하는 게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옛 산업 생태계는 새 세대의 아이디어와 융합하거나, 마치 세운상가 보행로처럼 다양한 업종이 공존하는 생태계로 진화 중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힙지로'란 말에서 보듯, 을지로와 세운지구 일대에서 일하거나 노는 게 어떤 세대에겐 하나의 정체성이 됐습니다.


누구도 오늘날 을지로를 이야기하려면 이 정체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쌓아온 터전을 뒤엎고 세운지구에 또 통개발이란 그림을 제시한다면, 단기간 개발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의 진흙탕 싸움만 또 부추기는 꼴이 될 게 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심지어 미래 전망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미 서울은 '천만서울'이란 말이 무색하게 인구가 줄어 1000만명을 밑돌고 있으며, 20~30년 뒤엔 서울에서 필요한 상가 면적이 지금의 30~40% 수준에 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대규모 개발 계획에 대한 자본의 요구가 존재하지도 않는 거죠.

나무는 스스로 자랍니다. 늙고 썩어가는 가지를 당장 쳐내고 싶겠지만, 그 가지는 재빠르고 큰 새들에 밀린 약하고 어린 새들의 안식처가 됩니다. 수명을 다한 가지는 때가 되면 꺾이고 줄기에서 새 가지가 자라고요. 도시도 나무처럼 스스로 자랍니다. 한 번에 싹 밀고 '그림 같은 집(도시)'을 짓겠다는 환상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작 점진적인 개발'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다양성과 큰 활력을 가져오는지 을지로와 세운상가의 현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세훈 “세운상가 위에서 분노의 눈물 흘려···피 토하는 심정”>, 2021년 11월18일, 경향신문

**어보브 스튜디오(ABOVE studio) 인스타그램(instagram.com/above.studio/)

***<명동·이태원·신촌 이미 ‘텅텅’···“2045년 필요한 상가 70% 감소”>, 2021년 10월10일, 경향신문

커버 이미지 ⓒ세운협업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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