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대장주(투자 가치가 큰 주식을 가리키는 말)'로 보통 세대수가 많은 이른바 '대(大)단지'를 꼽는다. 단지 규모가 클수록 부동산 가격 하락기에는 잘 버티고, 상승기에는 가파르게 오른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한 1000세대쯤 되면 대단지라고 했지만, 요즘은 사정이 좀 다르다. 최근 10년 내 완공한 아파트 단지 480개 중 1000세대 이상 단지는 105개로 20%가 넘는다. 이래서는 그다지 차별성을 띠기 어렵다 보니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단지 기준은 점차 상향돼, 요즘에는 2000~3000세대는 되어야 대단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큰 단지는 송파구의 헬리오시티로 9510세대가 산다. 직방형의 이 단지에서 긴 변은 거의 1킬로미터에 달한다.
ⓒ허남설
대단지가 잠식한 우리 도시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쭉 가난한 도시노동자가 모여 살았던 어느 산동네가 1980년대엔 판자촌에서 빌라촌으로, 21세기엔 다시 뉴타운 아파트로 변신한다. 4000여세대 대단지 아파트가 되기 전, 이 동네에는 마을버스가 다녔다. 간선·지선버스와는 또 다르게, 크기가 작은 마을버스는 도시 구석구석을 다니며 실핏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공사판이 된 5년 동안 멈춘 버스를 재가동하려 하자 대단지 주민이 들고일어나 반대한다. 마을버스는 시끄럽고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면서! 이건 몇 년 전 서울 마포구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마을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마을버스가 다닌 도로는 대단지의 사유지가 아니었고, 마을버스는 대단지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동네를 연결했다. 그럼에도 이 대단지는 마을버스를 멈춰 세웠다. 대단지는 이렇게 수천 세대를 결집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다. 단순히 각 세대가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권력집단이 되었다. 그래서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은밀하게 대단지 주민에게만 따로 공약을 전달한다. 그 약속은 오로지 대단지만을 위한 것이어서 믿을 게 못 된다. 가령, 지하철 노선을 이 단지에서는 이 근처로 끌어오겠다고, 저 단지에서는 저 근처로 끌어오겠다고 한다. 이 단지도, 저 단지도 다 자신의 지역구면서.
이런 전설에 비하면, 대단지에 높이 1.5미터 철제 울타리를 빙 둘러 등굣길이나 등산길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가소롭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모두 가벼이 볼 사건이 결코 아니다. 길 좀 막은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대단지가 생겨도 너무 많이 생긴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단지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영탁(배우 이병헌)을 위시한 황궁아파트 주민이 단지 밖에서 식품 등 주변 자원을 휩쓸어오듯, 대단지가 아닌 그 외 지역을 황폐하게 만든다. 도시의 공적 공간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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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일부 '공원형 아파트' 단지가 택배 및 배달 차량 진입을 금지해 논란이 됐는데, 이런 단지에 사는 주민은 도시공원의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된다. 단지 안에서도 얼마든지 녹지와 휴식, 운동 공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단지의 생리 자체가 입주민 수만으로 이른바 '커뮤니티 시설(헬스장, 어린이집, 카페 등)' 운영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 1000~2000세대, 3000~4000세대, 5000~1만세대로 더 커질수록, 마치 '규모의 경제' 논리처럼 운영 가능한 커뮤니티 시설 종류가 수영장, 도서관 등으로 점점 늘어난다. 이런 시설을 잘 갖춘 대단지가 도시에 더 많이 생겨나 '자급자족'할수록, 도시민 전체가 공유할 공적 공간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단지 내 헬스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뜀박질할 동네 공원을 찾지 않아도 된다. 헬스장 대신 수영장, 도서관, 카페를 넣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시설은 대개 입주민만 이용 가능한 장치를 두거나 그렇게 공간을 설계하므로, 도시 전체가 공유하기도 어렵다. 2010년대 초 재건축한 서울 한강변의 어느 대단지에 얽힌 일화가 있다. 이 대단지는 재건축 과정에서 서울시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 어린이집, 도서관, 독서실, 카페, 수영장, 헬스장, 경로당 등 커뮤니티 시설을 아파트 비-입주민인 지역주민에게도 개방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조건을 받는 대신 층수 규제를 뚫고 서너개 층을 더 높였다. 이로써 이 단지는 더 많은 '로열층'을 확보했는데, 화장실 가기 전과 후의 마음은 달랐다. 커뮤니티 시설의 개방 범위를 '구'에서 '동'으로 좁혀야 한다고 우겼고, 관철했다. 어느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이 단지의 재건축 관련 의혹을 다뤘는데, 이 개방 건에 관한 재건축조합장의 말도 방송을 탔다. "결국 우리 단지가 다 이용해요. 외부인이 없어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단지 안 사람'과 '단지 밖 사람'의 생사가 걸린 갈등을 다룬다. 우리 도시는 생사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이 꽤 괜찮은 거주환경을 누리는 데 필요한 편의와 복지를 두고 단지 안 사람과 단지 밖 사람을 가르는 곳이 됐다. 대단지는 우리 도시에서 래미안과 자이도 모자라 래미안 원○○○, 자이 프○○○○처럼 정체와 기원을 알 수 없는 괴상망측한 이름을 붙여가며 무한증식 중이다. 중세 봉건시대 사람들은 성 안 사람과 성 밖 사람으로 나뉘었다. 우리 도시는 이제 단지 안 사람과 단지 밖 사람으로 나뉜다. 중세에는 성 안 사람을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우리도 이제 단지 안 사람에게 어떤 고유명사를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이축복, 「[부동산 빨간펜]“왜 우리 단지에 외부인이 드나들죠?”…펜스 치는 아파트들」, 『동아일보』, 2023년 8월 27일 자
남지현, 「“가져가” “갖다줘” 5000세대 고덕동 아파트 택배난리」, 『조선일보』, 2021년 4월 4일 자
서울시 주택정책실 주택공급기획관 공동주택지원과, 「서울시 공동주택 아파트 정보」, 서울 열린데이터 광장에서 2023년 8월 17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