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소비의 삽질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만 까다로운 잣대가 필요한 것이 ‘소비’라는 걸. 결혼하고 나서 인지, 직장을 그만두고 경제력을 잃었을 때였는지, 아니면 아이가 태어나서부터였을까?
자식에게는 관대한 소비가 나에게는 엄격하다. 옷을 살 때도, 스킨을 하나 구입할 때도, 먹거리를 고를 때 조차도 나를 기준으로 무언가 구입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의 상황을 고려하여 소비하게 된다.
소비의 자린고비는 나에게만 적용된다. 주식에 비유하자면 주부는 미래가치투자로서 매력이 없다. 투자로 본다면 마이너스라는 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 과감한 ‘소비’를 한 것이 있다. 바로 치아교정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는 사이 치과에 갈 일이 없었다.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치아에는 치석이 눈에 띌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치석을 제거한 자리에 구멍이 생겼다. 원래도 치간 사이가 벌어져 있었는데, 그 자리에 치석이 끼였고, 치석을 제거한 자리가 휑~해진 것이다. 치아도 나이가 들면 벌어진 자리는 더 벌어지고, 치석을 제거하면서 치아의 뼈도 조금씩 깎아져 나간다고 한다. 치석을 제거하고 돌아와서는 자꾸 치간 사이가 신경이 쓰였다.
사실, 교정을 해야겠다고 결혼 전부터 생각을 했었다. 어릴 때는 가난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포기했고, 여력이 된 성인이 되었을 때는 시간에 발목이 잡혀 교정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을 때는 돈이 없고, 돈이 있을 때는 시간이 없다.’ 딱 그랬다.
누구나 외모 콤플렉스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눈이 작아서, 키가 작아서, 피부가 검어서, 머리숱이 작아서… 따지고 들자면 헤아릴 수 없다. 그중에서도 나는 제1순위가 “치아”였다. 치아를 훤히 드러내고, 목젖이 보일 만큼 화통하게 웃는 얼굴이 가장 부러웠다. 사진을 찍을 때도 입을 활짝 벌려 경직 없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나는 웃을 때마다, 나의 웃는 모습을 의식했다. 입을 다물고, 옅게 웃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마음껏 치아를 드러내고 웃어보질 못했다. 다른 외모 콤플렉스는 충분히 극복하며 살았다. 눈은 개성 있다고 우길 수도 있었고, 키는 작아도 귀여움으로 포장하거나 높은 힐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피부는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라고 말하고 다녔고, 머리숱은 펌으로 부풀려 보이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극적으로 웃는 내 모습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못 마땅했다. 나의 치아는 나의 자존감에 늘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결혼도 했는데, 이제 누가 봐줄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제 와서 치아교정을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혼도 했는데]
[이제 누가 봐줄 것도 아닌데]
[왜? 굳이]
결혼을 했어도, 결혼을 안 했어도 나는 [치아 교정]을 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며, 잘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왜? 굳이라고 묻는다면, 이 번 생에 하지 않고 죽으면 가장 후회할 일이 될 것 같았다. 웃어야 행복이 온다는데 잘 웃을 수 없으니 나는 행복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 스스로 나의 품위를 지키고 나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치아교정을 했다. 치아교정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쉽지 않은 불편한 과정임을. 그럼에도 기꺼이 그 과정을 버텼고, 관리 중이다.
요즘 나는 후회 없이 마음껏 ‘꺼이꺼이’ 숨이 넘어갈 듯, 목젖이 보이도록 웃는다. 치아교정이 끝 나갈 즈음 코로나 시대가 되었다.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싶었던 나의 치아는 마스크 속에 숨어버렸지만, 나는 마스크 안에서도 환하게 웃는다.
어쩌면, 과장되게 웃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웃음의 호탕함을 나만 알 수도 있다.
어쩌면, 웃는 내 모습의 밝음을 나만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며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타인은 결코 알 수 없는 치부가 나를 주눅 들게 하고, 병들게 하기도 한다. 나만 아는 그 치부에 돈을 쓰는 일이 타인은 쓸데없는 소비라고 여길 수도 있다. 때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비난할지라도 자신을 위해 과감하게 “소비”를 하자. 그런 소비라면 그 어떤 소비보다도 자기 생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