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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Sep 25. 2016

면죄부

사죄2

 단골인 유명 수제 맥주 집엔 오늘따라 사람이 별로 없다. 금요일 저녁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없는 건 과일소주 탓인가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구석의 한쪽 자리에 앉자고 한다. 이십 대 초반에 처음 만난 이후로, 종종 술이 생각나면 만나는, 과일소주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는 이런 만남에 너그럽다.

 그녀는 오늘도 자기가 적은 글이라며 몇 단락 몇 단락씩을 보여주는데 독서를 좋아하는 나로선 아주 반가운 일이다. 그것도 맥주 한두 잔 운이 좋으면 소주 한두 병을 앞에 두고, 작가 지망생이라는 그녀의 싱그러운 보조개를 힐끗하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줄어든 맥주가 아쉬운 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특유의 무심함과 싸늘함이 있다. 눈 아래로 종종 보이는 미소 끝에 매달린 보조개는 한사코 나는 싸늘하지 않다고, 나는 아직도 세상을 사랑한다고 반기를 들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보조개는 사랑보다는 연민에 가까운 것도 같았다. 어찌 되었든 보조개 아래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사랑도 연민도 아닌 싸늘한 어떤 것이었다. 역시 보조개의 귀여운 반란은 여기까지인가.


 “선생이라는 작자. 치사한 놈.”


 담담하고도 나긋한 음성이지만 억양 없다가 뚝 떨어지는 끝맺음. 요새 애들과 다르게 침착한 면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점도. 어렸을 때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도통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교과서, 문제집이 아닌 진짜 글을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된 그녀가 자신이 쓴 글이라며 보여줬을 때,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 떨어진 낙엽이 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가을 하늘인지 낙엽을 떨군 나무인지 밟히는 낙엽인지 몰라도 그랬다. 네가 그런 건가.


 “내 글을 보고도 구체적인 지적이 없어. 더러운 손으로 무테안경만 고쳐 잡으면서 갸우뚱거리기만 하고. 역겹다.”

 “난 네 글 좋기만 하던데.”

 “내 주인공이 또 매력이 없대. 희망이 없다나. 써가면 고개만 절레절레.”


 그녀의 선생이라는 사람은 항상 모호한 대답만 늘어놓는단다. 희망을 그려내도 그려내도 항상 돌아오는 대답은 ‘이게 아니야’뿐이란다. 저번에는 아예 희망이 필요 없는 소설을 써보겠다고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었다. 보조개라도 다정했던 그녀는 양반이었다. 그걸 넘어서 그녀의 작품은 마치 지옥 그 자체였다. 디스토피아 소설로서 그럴듯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 지옥에서도 희망이라는 꽃 한줄기를 찾으면서 절레절레 무테안경만 고쳐 잡았다지만.

 그녀의 푸념을 처음 들었을 당시에는 예술을 배우는 것이 시작에는 당연히 어려운 법이니 그러려니 생각하라 했었다. 듣다 보니 계속되는 그의 무심한 가르침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그 비싼 과외비를 받으면서 연신 ‘희망이 없어’ 혹은 ‘아니야 아니야’만 일삼고 다른 조언을 아끼는 것은. 피시방 아르바이트로 몸을 축내면서 번 돈으로 겨우 과외비를 대는 그녀가 밑 뚫린 독에 물을 붓는 것만 같았다. 새벽같이 피시방에 출근해서 악덕 사장에게 몹쓸 CCTV로 사사건건 감시나 당하면서.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다른 것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에도 그녀는 그나마 한 문장이라도 더 쓸 수 있는 것이 피시방 아르바이트라고 괜찮다고 했다.

 한 술 더 떠서 그녀는 그녀 스스로 자신의 삶이 이 정도로 팍팍해져도 싸다고 말했다. 지난번에 소주 한 잔 할 때였나. 취했는지 그녀는 주꾸미 집에서 소주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움켜쥔 채 자신이 죄인이라며 비슷한 말만 반복했었다. 빈 소주잔을 손에 계속 쥐고 있었기 때문에 소주잔이 죄인을 상징하는 어떤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우연하게도 범죄의 서사에는 소주잔이 대개 좋은 풍경을 장식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타버린 주꾸미 건너편에 떠있는 그녀의 불그죽죽한 볼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그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이른 새벽마다 CCTV를 보면서 아르바이트생의 청소상태를 감시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장이 얄밉지만 자신은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자기는 평생 책상 위에 스탠드 아래에서 병신같이 글이나 쓰거나 피시방 모니터 앞에서 프로메테우스가 간을 쪼이듯 눈을 쪼이며 살아도 모자란 팔자라고. 악에 받친 듯 벌건 눈에 소주잔을 움켜쥐고 자신의 생각과 말로 스스로 생채기를 내다가 탁하고 내려놓고는 금세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눈에 초점을 잃었었다. 그 눈을 좇아 묻고 싶었지만 굳이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았다. 그곳은 내가 알 수 없는, 아주 먼 곳의 일인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저, 단지 그저 너무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었다.

 탁! 이번에도 그녀는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조금 남은 맥주는 사납게 흔들렸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멍 때려. 아 답답해. 집이나 갈래.” 그녀는 핸드백을 채가듯 집어서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지갑을 꺼냈다.

 “왜 이래. 내가 살게.” 잽싸게 그녀의 카드를 뺏어서 내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그녀가 술만 먹으면 지갑을 여는 것도 고마운 버릇이지만 형편을 아는 나로서는 안쓰럽기도 하다. 2층에 위치한 맥줏집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와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우리의 버릇대로 걸으면서는 말이 없는 탓인지, 맥주에 조금 알딸딸해진 탓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달이 뜬 가을 하늘의 옅은 구름 아래 젊음이 가득해 소란스러운 거리를 스치듯 걷고 있었다. 가을바람 한줄기가  귀 밑으로 스쳐 지날 때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도, 젊은 거리의 소란스러움도 옅어졌다. 오늘따라 외로운 가을바람이 그 거리에서 우리를 외따로 남겨두었다. 도착한 지하철 역, 역 앞에서 조용히 우리는 헤어졌다.




 다음 해 봄, 뜬금없이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만나자고. 우리의 만남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유 없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벚꽃이 지다만 가로수길에서 빙그르르 떨어지는 벚꽃잎이 어깨에 머문 듯이 마주쳤고 여리한 그녀의 원피스는 살랑였다.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가웠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만큼은 반갑지 않았다.

 오늘의 만남은 지하철 역 앞의 조용한 우리의 뒷모습에서 시작된 각자의 삶에서, 다시 한번 여기에 우리를 불러내었다. 마치 헤어진 적 없었다는 듯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별다른 말없이 한적한 술자리로, 언젠가 한번 갔었던 닭발집에 찾아갔다.

 낮은 천장에 반지하인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로 완벽했다. 벽의 빼곡한 낙서들 사이엔 우리가 언젠가 술 먹고 웃으면서 했었던 낙서가 있을 텐데, 찾아서 추억하기엔 이미 낯선 이들의 추억들로 덮어 쓰여있었다. 해가 지다만 어스레한 벚꽃나무 밑에서부터 닭발집에서 술상을 사이에 두기까지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숯불이 먼저 나오고 닭발이 나왔다. 숯불 위에 닭발은 위태롭게 쪼그라들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닭발은 타들어갔다. 바들바들 떠는 걸까. 어서 그 불안을 뺏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닭발을 뚫어져라 보다가 대뜸 내게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너가 뭔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나한테 처음 만난 날 했던 말 있잖아 그거.”

 “아 그때! 그걸 아직도 기억하네.”


 처음 만난 날 나의 궁금증은 나를 떠밀어 그녀가 앉아있는 그곳에 앉혔었고, 그녀의 궁금증은 오늘 나를 여기에 앉혔다. 내가 그녀가 있던 테이블에 찾아가서 처음 만난 그녀에게 건넨 질문을, 지금 그녀가 내게 하고 있다. 나도 내가 무슨 용기로 시끄러운 음악이 가득한,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있는 술집에서 처음 만난 그녀에게 그런 멍청한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얼핏 생각하기로 그녀의 싸늘한 얼굴에 어울리는 보조개를 띄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엉겁결에 꿈이 뭐냐고 물었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꿈을 묻는 사람이 어딨냐며 그녀는 쌀쌀맞게 대꾸할 뿐이었다. 주눅들지 않고 나는 여깄다고 자신 있게 내 꿈을 뱉었었다. 젊은이가 갖는 그런 꿈 말이다. 이제는 소름 돋는 말이 되었지만 나는 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당당한 ‘나’.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그런 삶을 사는 '나'. 그렇게 꿈을 찾다가 우리는 그 어지러운 곳을 빠져나와서 그녀의 집으로 몸을 향했었다.


 “왜, 너 자신이 되는 게 꿈이라며. 너 자신이 도대체 뭔데.”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고 한 입에 털어 넣고는 그녀는 말했다. 화난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말투가 나를 단번에 닭발집 구석자리에서 지옥의 한가운데로 떨어뜨렸다. 지옥은 숯불보다 뜨거웠고 나는 닭발보다 괴로웠다.

 말을 뱉을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패기가 있었다. 꿈이라는 질문에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던 그런 나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을 다니고 괜찮은 키와 외모, 충분히 미래에 자신이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학업, 연애, 돈, 취업, 일 그리고 가족. 지금 내 어깨 위엔 그때 나의 어깨보다 많은 짐들이 올려져 있다. 꿈이랍시고 나를 찾기에는 내 짐들이 너무 무겁다. 이제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꿈을 묻는 일은 처음부터 없을 것이다. 부끄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묻지 않는다.


 “사실 그걸 이제 모르겠어. 그때는 안다고 생각했었어.”

 “뭐야 장난하냐.”


 그녀는 싱겁다는 듯 피식 바람 새듯 웃었고, 빼꼼한 보조개는 지옥에 떨어진 나를 다시 닭발집 구석자리로 돌려놨다. 떨어진 심장은 제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다시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은 좀 썼어?” 사람에게 숨을 쉬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답이 뻔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의례적으로 물었다.

 “응. 그런데 잘 안돼.”

 “항상 잘하려고 하는 건 잘 안돼.”

 “오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사춘기 소녀처럼 궁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도 그녀가 궁금했다.

 “잘 안되니까 잘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네. 그거 위로야?”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가끔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가끔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언제는 오히려 발가벗겨진 기분이 시원하다. 그녀 탓인가.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위로의 한잔하시죠.” 우리는 건배를 했다. 위로는 달았다.


 이야기는 돌고 돌았다.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 이야기처럼 변하고 변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돌고 도는 이야기만큼이나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 뒤따라 소주잔이 테이블 위와 입술 사이를 돌고 돌았다. 천장도 조금씩 도는 듯했다. 어느새 처음 만난 날처럼 소주병이 숲을 이루고 발가벗은 것도 아닌데 나무들 사이로 그녀의 볼은 수줍어했다. 그리고 두 볼 사이 새빨간 그녀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 시커먼 독사과를 내뱉었다. 왕자의 키스는 없었다.


 “사실 나 고등학교 때 아빠 돌아가셨어.”

 “……”


 그녀는 알아서 자기 잔을 스스로 채웠고, 나도 대꾸 없이 내 잔을 채웠다. 추모의 잔인 것처럼. 두 잔은 닿지 않은 것처럼 닿지 않을 것처럼 마주치고 두 사람의 메마른 목을 적셨다. 유난히 쓴 그 한 모금은 목을 타고 흘러가면서 불편할 정도로 흐르는 곳마다 불을 질러댔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마주하는 것보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마주하는 것, 이보다 불편한 것은 없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내 입을 틀어막고 막다른 벽에 세워놓는다. 뒤돌아나갈 길이 있으면 좋으련만 대화는 항상 의도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시답지 않은 위로는 침묵보다 보잘것 없어서 나는 위로를 그만두기로 한다. 아버지가 번 돈으로 무리 없이 대학교까지 졸업한 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회사생활이 힘들다, 아버지의 간섭이 피곤하다 투덜댄 날들이 내 입을 저절로 다물게 했다.


 “그렇게 그럴 필요 없어. 사고였어. 그냥 그렇다고. 말 안 하고 있는 것이 뭔가 속이는 것 같아서 말한 것뿐이야.” 그녀는 침묵하는 나를 외려 위로하듯 말했고 덧붙여 술김이 그녀를 더 솔직하게 만들었다. “나 때문이야 사실. 내가 그 날 그 난리만 안쳤어도.” 그녀는 소주병을 들고 기울여 병 안의 소주를 잔에 흘려보냈고 그리고 소주는 잔에서 흘러넘쳐 테이블을 적셨다.

 나는 기울어진 소주병을 막지 않았다. 그녀의 보조개는 도망가고 차가운 눈엔 소주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가득했다. 나는 듣고만 있었고 소주병이 만든 숲은 울창해지기만 했다. 닭발집의 숯불 연기가 뿌옇게 일어서 가게 내부의 배경을 하나, 둘, 셋 지웠다. 가게엔 그녀와 나뿐 다른 것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늦은 밤, 어지러웠다. 닭발집을 나서면서 입 안엔 소주 숲 내음이 가득했고 머릿속엔 팽이가 위태롭게 돌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익숙한 우리의 거리에서 그녀는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나 보다. 그녀는 아닌 밤중의 거리 위에서 고해성사를 치렀고 나는 그녀의 죄를 사하여주기로 했다.

 택시기사였던 아버지.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녀. 받고 싶었던 글쓰기 과외. 뒤집어진 안주상과 땅바닥에 흩어진 멸치대가리. 깨진 소주병. 업무용 택시 키를 쥔 채 돈을 벌어오겠다며 비틀거리며 나가는 아빠. 부여잡은 엄마의 손을 뿌리치는 아빠의 손. 그 해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10중 추돌사고. 조촐했던 가을의 장례식. 그녀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녀가 나를 기다리던 벚꽃나무 밑에서 나는 그녀의 죄를 용서했다.

 그리고 내가 지은 죄들이 하나씩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눈을, 귀를, 코를,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내가 사한 그녀의 죄가 높은 의자에 분통한 듯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찍을 휘두르며 심판했다. 벚꽃나무처럼 보이는 줄지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벚꽃잎이었나. 사람들은 삼판장에 모여서 내게 돌을 던졌다. 악다구니를 질러댔다. 너는 네 삶에 떳떳하냐, 네 삶에 떳떳하냐고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무거운 어깨의 벚꽃잎을 털었다. 나는 몸 들 바를 몰랐고, 몸 들 줄 모르는 그녀를 부축하고 서둘러 그 자리에서 걸어나갔다.


 정말 마지막으로 우린 한잔을 더하기로 했다. 늦은 새벽, 홀로 밝은 편의점에서 우린 빵과 포도주를 샀다. 정말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녀의 자취방은 역시 좁았다. 앉은뱅이 탁자 위엔 그녀의 엄마가 주기적으로 보내준다는 반찬통들이 어지럽게 모여있었다. 사 온 빵과 포도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하나밖에 없는 포도주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 나누어마셨다. 평소엔 잘 피지 않는 담배를 하나 꺼내 나누어 피었다. 우리는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너는 어떤 표정이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터질 듯이 타고 있는 담배를 건네주었다. 나는 울었는지 너는 웃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침대는 달랑 매트리스뿐이었고 머리맡의 재떨이 위엔 담배꽁초가 하나도 없었다. 담배를 건네받았다. 포도주병이 비고 빵이 조금 남았다.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하나 있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우리는 같은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그러나 그때와 많이 다른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 이 매트리스 위에서 네가 누워있는 걸 보았었다. 너는 내게 분명히 낯선 사람이었는데도, 이 공간 이 순간 누워있는 너의 풍경이 언젠가 보았던 풍경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나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왠지 나만이 소유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닌 것 같았다. 풍경이 익숙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우리가 오늘 말고 언제 같이 잔적이 있었나.’ 입술과 입술 사이의 축축함은 분명 낯선 것이었는데 내 눈에 네 모습이 익숙하게 비치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첫사랑이라는 사람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누워있는 모습 그 자체로 내게 익숙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만의 풍경이어야 할 저 모습이 내 풍경만은 아닌 느낌이 드는 까닭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다른 누구도 비슷한 풍경을 소유할 수 있었으리라. 나는 내 소유권에 스스로 흠집을 내고 있었다. 너를 처음 본 그날, 익숙한 듯 낯선 듯한 너의 풍경을 나만이 소유하고 싶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무례한 사람이었을까. 지금 다시 우리는 그곳에 와있다.


 머릿속의 팽이는 돌고 있지만 곧 쓰러질지도 모른다. 오늘도 네 손은 그날처럼 차가웠지만 네 몸은 그날처럼 뜨거웠다. 이상하게도 오늘의 풍경은 익숙한지, 풍경을 갖고 싶은지 알고 싶지조차 않았다. 네가 첫사랑을 닮았는지도, 내가 무례했었는지도 무례한지도 관심이 없었다. 단지 눈을 감고 누워있는 너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어쩌면 네가 나인 것도 같았다.

 아빠의 죽음. 밤새 뜬 눈으로 글을 썼던 날들. 사람 대우를 못 받아도 했어야 했던 피시방 아르바이트… 네가 지나온 시간의 파편들이 으스러져 내 눈앞에 떠올랐다.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니 파편들이 내 것인 것 같았다. 아, 나는 날카로운 파편들을 끌어안았다. 내 살결에 네 살결이 닿았다. 그 파편의 그 끝이 날카롭게 박혀들어왔지만 상관없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네가 보낼 시간과 내가 보낼 시간이 한데 어우러져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곳엔 무릎 꿇고 자책하는 우리들이 보였다. 우리는 평소처럼 소주잔을 비웠고 비우고 비운다. 울었고 울고 운다. 가슴을 주먹으로 쳤고 치고 친다. 우리는 죄인이다. 또 언젠가의 죄인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 모든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우리는 우리 몫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팽이는 돌기를 그만두었다.

 그래, 나는 나에게 첫사랑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금은 무례해도 될지도 모른다. 그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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