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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Oct 22. 2016

사죄

면죄부 2

1.

 별안간 꿈이었다. 전날 먹은 술에 몸을 절여 놓고, 하루를 꼬박 침대에서 신음을 앓은 날 밤이면 항상 날 깨운 것은 꿈이었다. 그 남자는 유난스럽게 나를 침대에 눕히지 않았다. 눕는 건 덜 낭만적이라나. 늦은 밤이 거나하게 술을 마신 날이면 외롭다는 낯선 남자들이 낭만을 찾는 것도 뻔한 거짓말이다.

 꿈은 항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택시를 타고 있었나. 눈을 감으면 꿈이 생각날 것도 같아서 눈을 감다가 그냥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한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 자취하는 날 위해 엄마가 싸준 반찬들이 무안하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시선이 스친다. 벌써 가을인가. 스산한 바람에 브래지어 위의 잠옷을 여미고는 담뱃갑을 열면서 동시에 누군가 하늘에 던져놓은 별을 찾는다. 오래된 습관이다. 마지막 한 까치, 그리고 별 하나. 억척스럽게 담뱃갑에 붙어있는 마지막 남은 담배를 떼어내어 입술로 옮기기까지, 죽음처럼 시간이 더디다. 마지막이라는 것에 죽을죄를 지었는지 마지막 앞에 나는 항상 죄인처럼 마음이 무겁다. 언제 마지막이 내게 천벌을 내릴지 모를 것처럼.

 벌써 천벌이라도 내려진 듯 우리 집 옥탑방 현관 앞에 그 많던 고양이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밤이면 종종 고성이 오고 가는 사나운 신혼부부 건넛집 창문마저 숨 죽이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벌을 받아 쫓겨났나 싶다가도 쫓겨났어도 내가 쫓겨났겠지라고 쓴 마무리를 짓는다. 하아, 가을을 몰고 온 서늘한 바람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폐 속에 켜켜이 스며든 담배연기가 엄마의 약손만큼이나 따스하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모습은 보기 안 좋다며 궂은일에도 낮밤으로 말리던 엄마가 폐 속에 가득 찬 담배연기의 다정함에서 느껴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후우, 담배연기를 뱉는다. 폐를 벗어난 자유로운 담배연기 사이사이 칠해진 밤 속에 익숙한 별 하나가 보인다.

 내가 힘이 들 때면 항상 바쁘다고 코빼기도 안 뵈던 친구들이 무슨 너답지 않게 별이냐고 실소를 했지만, 별을 보는 일은 어느새 혼자 있는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가 되었다. 별을 보고 있으면 지옥 같은 밤도, 잊고 싶은 어제도, 짊어져야 할 내일도, 그리고 가족도 점차 희미해져서 결국엔 사라졌다. 모든 사물이 벌을 받아 쫓겨난 것인지 내가 쫓겨난 것인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나와 세상과의 거리는 아득해졌다. 아득한 세상에서 별은 손에 닿을 것만 같았다.


2.

 6시 30분. 이 시간에 거리에 나올 일이 없었던, 어릴 때는 대단히 이른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벌써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내 나이 또래나 될 거 같은 남자 두 명. 화장을 고치고 있는 여자 한 명. 힐끗 버스가 올 도로를 보면서 영어단어를 외우는 학생 몇몇. 나도 그 틈새에 쭈뼛이 서있다.

 6시 30분, 분명 이른 시간인데도 그들은 당연스럽게 그 자리에 나와 함께 서있었다. 벌써 2년 넘게 해온 출근길이지만 새벽 공기와 분주한 사람들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렇다기보다는 고작 아르바이트 가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았다. 나만 한낱 아르바이트에 내 아침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란 건 모래성처럼 파도가 휩쓸고 가면 사라질 덧없는 것인가 싶었다. 습관처럼 버스가 왔다.

 “뽀글이 하나랑 콜라 하나 주세요.”

 출근하자마자 라면을 끓이다니. 뽀글이는 피시방 아르바이트생에겐 가장 피곤한 메뉴이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빼다가 손을 여러 번 데었다. 야간 아르바이트생 오빠는고시 공부를 준비하더랬나, 모나미 팬 똥을 손에 잔뜩 묻히고는 졸린 눈으로 나를 반긴다. 오전 아르바이트 역시 졸리긴 마찬가지여서 야간 담당 오빠는 이미 내가 겪을 고초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뭐 변기가 막혔다거나 그런 거 없죠? 잔액 다 잘 맞고요?”

 “없어. 다 맞아. 아아 진짜 졸리다. 나 먼저 갈게. 라면이나 어서 갖다 줘라.”

 내가 가방을 카운터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오빠는 떡진 머리를 하고서 보기에도 무거운 가방을 등에 들쳐 매고 학원을 간다고 쫓기듯 피시방을 나갔다. 오빠는 하루도 잔소리를 아끼는 법이 없지만 무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아서 그 말이 오히려 교대마다 정겹게 들린다. 동병상련인가.

 야간 담당 오빠와 피시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웠을 것으로 보이는 퀴퀴한 손님 몇 명만 공기알처럼 덩그러니 남아있다. 내게는 이제 익숙한 얼굴들이다. 새벽같이 일어난 나도 피곤했지만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그들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은 사람처럼 만들었을지 궁금해서 대걸레질을 핑계로 눈동자를 굴려 엿보았지만, 색색으로 번쩍거려 죽은 사람의 얼굴에 비치는 색만 변하게 할 뿐 모니터는 어떤 내용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의 세계이려니 대걸레질을 고쳐 잡는 순간, 습관처럼 전화벨이 울린다. 시발. 또 그 전화다. 대걸레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받는다.

 “네. 사장님.”

 “무슨 전화를 그렇게 받냐. 목소리에 힘도 없고, 사장 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

 “걸레질을 하려면 제대로 해. 저기 1번부터 15번 라인 제대로 안 닦은 거 같은데. 그리고 의자를 빼고 하랬잖아. 그게 더 빠르다고. 그리고 손님 있을 때 흥얼거리지 마. 입모양이 노래 흥얼거리는 거 같던데.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써서 그런가 왜 이래 진짜.나가서 사회생활이나 하겠냐. ”

 "…"

 지긋지긋한, 아침마다 반복되는 전화벨은 사장의 트집 잡이의 시작을 알린다. 아르바이트를 쓰면서도 CCTV로 아르바이트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장은 그 누구보다 부지런하다. 안 봐도 훤한 사장의 표정이 눈 앞에 그려진다. 벗겨진 머리에 항상 충혈된 눈. 항상 잔뜩 찌푸린 얼굴. 전화를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미간에 자꾸 힘이 들어가고 표정이 굳어, 덧붙여질지 모르는 트집을 피해 CCTV를 등진다.

 이제는 피시방의 어느 구역이 감시의 사각지대인지 저절로 외워버렸고 그 구역들이 유일한 도피처가 되었다. 난무하는 지적과 트집 속에는 조금씩 독설이 섞여있었고 그걸 끝까지 듣기엔 내가 아직 어린 탓이라고 자책했다. 내 눈은 전화기가 뱉는 피로를 넘어 컴퓨터들이 줄지어 있는 풍경을 보았다. 1번 컴퓨터부터 2번, 3번… 15번. 마치 인간과 기계와의 전쟁을 다룬 공상 과학 영화 속에 나는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열병식에 참여한 컴퓨터, CCTV들은 나를 에워싸고 있다. 나는 지금 이 기계들과 싸우고 있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 기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고 기계는 무표정할 뿐이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 귀가 따가운 통화 종료음.

 많은 아르바이트 중에서 피시방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돈은 필요하면서도 자기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침 청소에, 적은 손님들의 시중을 들어주면 그것이 끝이었다. 이제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청소를 마치고 카운터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빼곡한 글자들과 날 기다리는 펜이 나를 독촉했지만,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마다 익숙한 한바탕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머리에서 쉽게 내려가지 않는 체증을 남겼다. 내겐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고 참을 인을 새기듯 10번을 되새기고 다시 책을 들여다봤다. 머리가 띵했다. 글자는 흐릿해져 잉크가 바다를 이루었다. 잉크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끝은 있는 걸까. 책의 두께가 철벽보다 두꺼워보였다. 내 앞에 놓인 책은 두 권이 되고 세 권이 되고 네 권이 되었다. 책들이 불어나고 불어나서 산이 되고 피시방을 메웠다. 산은 다시 쏟아져내렸고 손등과 어깨, 머리통을 짓눌렀다. 두들기는 키보드 소리들은 채찍 소리가 되어 나를 할퀴었다.


3.

 며칠밤째인지 나는 책상 앞에서 눈만 뜨고 있다. 오늘도 책상 앞의 프로메테우스는 벌을 면치 못하고 뜬 눈으로 스탠드에 눈을 쪼이고 있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구겨진 종이들, 재떨이에 닿지 못해 흩어진 담뱃재는 책상의 주인이 분명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대단한 형벌을 받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둘 다 맞는 말인 것도 같아 펜 대신 십자가를 붙들고 죄를 빌어야 할 것 같지만, 내겐 그러기엔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빚이 갚아지기는 하는지 텔레비전에는 빚진 사람들이 한 무더기로 나와서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호소하지만, 자신이 빚을 다 갚았다며 자랑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아 뒷목 위로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내 빚은 갚아질까. 오늘도 밤을 새울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어제도 내 소설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네 주인공은 하나 같이 매력이 없어." 하고는 어디가 어떻게 매력이 없는지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시크한 예술가라도 되고 싶은 것인지 아르바이트비를 털어 모셔놓은 그 선생이 덧붙이는 말은 "희망이 없어. 희망이." 뿐이었다. 되물어도 돌아오는 건 무테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갸우뚱해하는 의미 없는 습관뿐이었다. 주인공이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인지 플롯에 희망을 넣지 않는 것인지 혹은 다른 의중인지 알 수 없어 여기저기 희망을 칠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부족해." 거나 "어색해." 뿐이었다. 역시 내게 희망은 다소 서먹한 존재인가 싶어 절망과 타락을 들이부어 그럴듯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도 돌아오는 것은 "희망이.."라며 꼴 보기 싫은 갸우뚱거림 뿐이었다. 도대체 희망을 왜 절망과 타락의 정원에 한 송이라도 심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지금의 내 한계라면 한계 인가하고 굳은 몸을 작은 침대에 뉘인다. 자고 일어나면 금요일 밤이겠지 안도한다. 창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이른 새벽 매미소리의 시큼함 속에서 죽은 듯 잠이 들었다.


4.

  “꿈이 뭐예요?” 그가 물었다.

  “몰라요.”

 끔찍한 질문이다. 정말 끔찍하다. 꿈이 뭐냐니. 술김에 끄덕거려 마시게 된 첫 잔에 대뜸 낯선 남자가 묻는 질문이 꿈이 뭐냐는 것이다. 억하고 꿈을 뱉을 뻔했지만 취기에 꿈을 쏟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릇이다. 그 대답은 내겐 누명을 쓴 범인의 최후변론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아니, 나는 이미 내 꿈에 누명을 씌운 걸지도 모른다.

 이 남자의 질문도 별로지만 진지한 사람은 질색이다. 그것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진지한 사람은 더욱더. 빨갛고 파란, 촌스러운 클럽인지 술집인지 모를 곳의 조명은 의미 없이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를 따질 것 없이 우리가 있는 공간을 훑었다. 그 배경 속에서 원시인 같은 무리는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신의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밤의 신을, 망각의 신을 숭배하는 원시인처럼. 그리고 무리에서 잠깐 빠져나온 나 역시 원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미쳐 소주를 한잔 삼켰다.

 탁하고 내려놓은 소주잔에 소주가 남았는지 이유 모를 물방울이 하나 흘렀다. 나는 그것이 눈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태어나 꿈 많았을 유리가 처음부터 자기가 술집에서 소주잔이나 될 거라고는 알고 있었을까. 어스레한 붉은 조명 아래에 덩그러니 놓인 소주잔 하나가 청량리나 미아리 뒷골목, 정육점 같은 조명 아래 어린 여자들 같아서, 눈물일지 모를 그것을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괜찮다. 괜찮다.

 “왜요? 왜 혼자 마셔요. 꿈이 뭔데요.”

 “진지한 사람은 별로예요.” 나는 최대한 쌀쌀맞게 대답했다.

 술기운이 올라 볼의 한가운데에서 주변으로 조금씩 퍼져가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술기운 탓일까. 그의 눈빛이 내 눈으로 들어와서 쏜살같이 발끝까지 훑고는 미세한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기계음이 가득한 스피커의 울림은 쌀 한 가마니를 귀에 매단 듯 얼얼하였다.

 아직도 꿈이 뭐냐고 묻는 이 남자가 순수해 보이긴 해도 이쯤에서 선을 긋는 것이 적당한 것 같았다. 꿈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쌀쌀맞게 대답해서 그의 부질없는 기대의 끈을 끊으려 했다. 끈질기게 묻는 그의 탓인지, 끈기를 삶의 모토로 삼았던 아빠 생각이  문득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색한 술자리에 있는 나를 우리 집 그 술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아빠처럼 나도 끈기가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게을러서,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말은 죽기보다 듣기 싫었다. 차라리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듣기 편했다. 차곡차곡 나이를 쌓다가, 후에 최선을 다했었지라고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적어도 나는 내 앞에 놓인, 빌어먹을 인생이라는 젠가를 하나씩 빼서 차근차근 쌓고 있다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쯤이었다. 내가 쌓은 젠가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은. 엄마가 실컷 차린 안주상이 뒤집어져 무너져 내렸다. 흩어져버린 멸치대가리들, 어지러이 뒹구는 신김치들 그리고 날을 세운 깨진 소주병들 사이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그날도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힘없이 뱉었다. ‘알았어. 니 맘대로 해라…' 없는 살림에 취업을 포기하고 내가 글을 배우겠다고,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아빠는 술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업무용 택시를 몰고 들어오는 것이 위험한 것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아빠가 그러는 것이 일종의 시위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아빠는 시위를 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동료 기사 아저씨들한테 무슨 얘기라도 들었는지, 그날 아빠는 드디어 시위를 포기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아빠는 첫사랑에 실연당한 소년처럼 모든 자신의 세계가 붕괴된 듯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단 생각에 내심 기뻤다. 아빠의 망연자실은 나와는 아주 상관없는, 아주 먼 다른 은하계의 얘기 같았다. 꿈에는 귀천이 없다. 나도 내 인생을 살 수 있잖아요. 아빠 인생 말고.

 하지만 현실의 벽의 높이를 극복하기에 쉽지 않았다. 꿈이 있었지만 돈은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래, 과외시켜줄게라고 소리치며 결국엔 아빠는 안주상을 뒤집었다. 아빠의 목소리가 안주상을 뒤집었나 헷갈릴 정도로 그 소리는 컸다. 돈. 벌어줄게. 무너져내려 흩어진 멸치대가리들, 어지러이 뒹구는 신김치들 그리고 날을 세운 깨진 소주병 숲 사이를 비집고 아빠는 돈을 번다며 업무용 택시의 차키를 들고나갔다. 부여잡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는 비틀거리면서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그 길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차 사고였다. 그 해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내 꿈 역시 관 위에 던져 묻었다. 삶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네 삶 같은 건 사치라고.

 “진지한 사람은 별로지만 저는 진지하지 않아요. 그냥 앞에 계신 분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그래요. 우리 오늘 처음 봤잖아요.” 남자는 내 싸늘한 대답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히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하지만 불편했다.

 “누가 처음 만난 사람한테 꿈을 물어봐요.”

 “제가요.”

 “저 꿈같은 거 없어요.”

 건너 테이블에서 넘어온 남자치고 순수한 걸까 멍청한 걸까. 남자의 눈빛은 소년의 그것처럼 맑은 구석이 있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그것. 순수한 소년도 침략을 할까. 술병이 빼곡한 테이블을 건너온 남자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침략자처럼 언제나 웃을 것만 같은 얼굴 아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친절하지만 친절하지 않은, 유괴범이 건네는 달콤한 사탕 같은 그런 것 말이다. 그 뻔한 속임수를 모르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나 역시 침략자 중 하나다. 내가 노리는 것은 유괴범이 원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건네는 그 달콤한 사탕이었다. 망각. 망각이라는 사탕. 나는 그 사탕을 입 속 한가득 넣고는 그 단맛에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사실, 있었어요. 이제는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자는 궁금한지 진지한 얼굴이다. 진심일까.

 “어렸을 때 있었다가. 뭐.” 나는 말끝을 흐렸다.

 “저는 반대예요. 저는 꿈이 없었는데 생겼어요. 정말 다르네요. 남들은 꿈이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는 게 꿈이라는데. 저는 제가 되는 게 꿈이에요. 사람들은 저보고 별나다는데. 우습죠?”

 “자기가 자기가 되는 게 무슨 소린데요?”

 “그 있잖아요. 남들이 뭐 하면 잘 될 것 같다고 해서 하는 것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렇게 살고 싶은 건데.”

 “아 그거요. 꿈 좋죠. 꿈.” 어색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잔해요!” 남자는 해맑았다.

 긍정의 끄덕임 이면엔 동정의 가로 저음이 있었다. 이 남자의 순수함은 내 어렸을 적 그것과 닮아있었다. 이제는 내게 없는 순수함을 가진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서랍 속에 오래된 사진을 꺼내어 행복했던 그때를 추억하는 일보다 괴롭다. 갓 태어난 병아리는 그 단단한 알껍질을 깨고 한걸음, 두 걸음 밝은 세상 속으로, 기쁘겠지. 그리고 선배 닭들은 말하지, 꼬마야 세상은 힘들단다. 선배 닭들은 부리가 잘리고 목이 잘린다. 피흘리는 난 병아리에게 포기를 권하기엔 아직 이르다 생각하고, 꿈을 위하여 한잔을 들었다. 위로의 잔을 부딪혔고 잔은 다시 울었다. 건배.

 비우고 비우고 비웠다. 꿈 얘기를 하다 그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위하여. 건배. 위하여. 건배. 위하여. 건배. 꿈이 이렇게 달았나, 어지러웠나.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은 조용히 몸만 흔들어댔다. 원시적인 배경, 원색들이 떠도는 그 속에서 네 입모양만 대충 떠다녔다. 네? 뭐라고요? 아하하하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나랑 그는 그 어지러운 곳을 나왔다. 그리고 내 집으로 몸을 향했다.


5.

 별안간 꿈이었다. 전날 먹은 술에 몸을 절여 놓고, 하루를 꼬박 침대에서 신음을 앓은 날 밤이면 항상 날 깨운 것은 꿈이었다. 그 남자는 유난스럽게 내게 꿈을 물었었다. 지는 꿈이 있다나. 그나저나 자는 동안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꿈은 항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택시를 타고 있었나. 아빠였을까. 배게를 고쳐밴다. 이 남자는 자기 집인 듯 잘도 잔다. 잠이 안와 눈을 감고 내일 할 일을 잠시 그려본다. 내일은, 출근이던가. 글을 써야 하던가. 술 탓인지 머리가 몽롱하다. 시작과 끝이 연결된 고리 위에서 나는 어느 지점을 달리고 있는 걸까. 달리긴 하는 걸까 걷는 걸까. 기어가는 걸까. 그 지점이라도 알면 끝에 닿을 순 있을까. 더 이상 나아지는 것은 없을 것만 같다. 그냥 이 옥탑방 현관문을 연다. 옥상 계단 항아리 밑에 숨겨 놓은 담배갑을 찾는다. 별은 있을까. 별을 보려 올려보다 밑을 내려본다.



제목 사진 : 모던타임즈(2007) by 현홍

http://geonhi.com/korean/vg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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