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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Dec 11. 2018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1

사랑에 대한 오해

아침에 눈뜨면
침대에 가시가 가득해요
음악을 들을 땐
스피커에서 가시가 쏟아져요
나 걸어갈 때
발밑에 쌓이던 가시들
아무래도 내가 시계가 되었나 봐요
내 몸에서 뾰족한 초침들이
솟아나나 봐요
그 초침들이
안타깝다
안타깝다
나를 찌르나 봐요
밤이 오면 자욱하게 비 내리는 초침 속을 헤치고
백 살 이백 살 걸어가보기도 해요

저 먼 곳에
너무 멀어 환한 그곳에
당신과 내가 살고 있다고
아주 행복하다고
당신 생일 날
그 초침들로 만든 케이크와 촛불로
안부 전해요

- 김혜순, <생일>


 사랑이 인류 최대의 관심사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머리로 뚜렷하게 인지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이라도 사랑이 인간이라는 족속의 중대한 문제라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사실이다. 도무지 사랑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원시시대의 벽화부터 현재에 이르러 대중가요, 문학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시대와 장소를  찾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이렇듯 도처에 널려 흔하디 못해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사랑이 사실상 제대로 이루어내기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일까.


  에리히 프롬은 모든 인간의 해결 과제인 사랑에 대한 고찰의 결과를 책으로서 집필하였다. 그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 의학, 정비, 악기 연주 등의 기술처럼 사랑도 연마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사랑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해왔다고 말이다.(울지마라고 다그치는 엄마의 말에 울음 뚝 그치는 어린 아이처럼 감정은 훈련될 수 있다.)


Chagall, <The Promenade>, 1917 - 1918


1. 사랑에 대한 오해


 사랑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오해를 받아왔다. 첫 번째로,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닌, '받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일례로, 사랑의 과정에서 남성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되려는 일환으로 '능력'을 가꾸는 한편, 여성은 '외모'를 치장한다. 이는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저작할 당시의 예이지만, 최근에도 크게 변함이 없는 세태이다. 이러한 세태는 대가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Take & Give), 사랑 역시 교환의 일환이라는 자본주의적 발상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자본주의의 꽃인 시장에서의 상품은, 수요자가 살만한(willingness to pay) 모습으로 치장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거래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오해는 우리로 하여금 상대방을 꿰뚫고 있다고 착각하고 자만케 한다. 사랑에 참여한 상대방은 내게 사랑을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의 의무를 알고 있으므로 상대방에 대하여 꽤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남의 의무를 먼저 살피는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리라 기대하는 건 옳지 못하다. 그렇다고해서, 반대로 자신의 의무를 먼저 살핀다면 남에게 의무를 강요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로 하여, 잘못된 사랑은 우리에게 자만을 낳게 하였다.


 두 번째로, 사랑의 방법보다는 대상만을 사랑의 요건으로 고려해왔다.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은 행운의 이름으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사랑의 실패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성격', 사랑했었지만 '맞지 않는 사이' 등의 이유를 탓으로 치부되고 넘어갈 뿐이다. 본인이나 상대방의 '사랑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보통은 사랑의 실패를 겪은 후, 다른 사람(사랑의 제물)을 찾는 데에만 몰두하고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들이 사랑에 있어서 '기술'(사랑이라는 감정에 대처하는 자세 등)을 고려한다면, 이별을 선고할 때 '우리 여기까지야'라고 쉽게 말해져선 안된다. 사랑의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의 이별은 '내가 널 사랑하는 법을 못 찾겠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와 같은 맥락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지속성보다는 일시성에만 일방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사랑을 떠올릴 때에 사랑에 빠지는 순간만을 주요하게 여길뿐, 사랑이 지속되는 상황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심하게는 사랑이라 여기지 않기도 한다. 남남으로 지내오던, 외따로 살던 두 명이 사랑의 과정에 참여하여 벽을 허물고 밀접해지는 일을 우리는 기적으로, 또 진정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태생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첫인상에서 태어난 사랑은 첫인상이 옅어지는 순간을 넘어서기 어렵다.  이유는, 최초의 사랑의 접점인 첫인상으로부터 멀어진 참여자가 사랑과의 뚜렷한 격리감을 느끼는 탓이다.


Chagall,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 1936


 그렇다한들 그냥 하던 대로 사랑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물론, 하던 대로 유지하고 사는 일은 어떤 방면에서나 편리하다. 그러나, 프롬은 사랑이야말로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바르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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