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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Dec 17. 2018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2

사랑의 이론

Munch, <The Kiss>, 1897

2. 사랑의 이론


 사랑은 왜,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큰 차이점 중에 첫 번째를 꼽으라면 그것은 '이성'이다. 자연스러운 본능과는 다르게 이성은, 본능과 합치할 경우가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본능과 반하여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요구하기 일쑤이다. 대변을 배출하는 본능을 탓하며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바지를 내려 볼 일을 보는 인간은 없다.(정확히 말하면 드물다.) 거의 모든 인간은 배출의 '본능'을 참은 채로 화장실을 찾아 뛰어다니곤 한다. 이성이다.

 이러한 이성은 인간에게 '분리'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한다. 본능에 합일한 채 몸을 맡겨 사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가. 마려울 때 싸고, 배고플 때 먹고. 또 퇴사하고 싶으면 퇴사하고.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탓에 인간은 자연스러운 욕구인 본능을 저버린 채 이성을 따른다.(무의식적일지라도 '과연 이래도 되는 건가'하는 우려 속에서도 과하게 대변 배출의 욕구를 참는다든지, 과하게 퇴사 욕구를 참는다든지) 그리고 '불안'을 느낀다. 사회와 주변 지인들의 눈치에 떠밀려 직장을 갖고, 조건이 괜찮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가 있다. 주변에선 좋은 직장, 좋은 남편을 가진 그 여자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여긴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지만 여자는 어느 순간이라도 문득  '내가 바라 온 삶이 이런 건가'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남편을 과연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걸까, 그냥 적당하게 사랑하고 적당히 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등등의. 이것이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분리'로 인한 '불안'이다. 본능과의 분리, 욕구와의 분리, 자연스러움과의 분리로 인해 생기는 불안.


Munch, <Seperation>, 1896


 프롬은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을 꼽는다. 사랑 이외에도 <동물숭배, 인간의 희생 또는 군사적 정복, 사치에 탐닉함, 금욕적인 단념, 강제 노동, 예술적 창조>(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에서 발췌한 부분은 앞으로 <> 안에 적는 것으로 표시함.) 등이 있지만, 사랑이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프롬이 말하는 '성숙한 사랑'을 일컬음 - 왜냐하면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 방법들은 임시방편에 불과하거나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방법이 왜 임시적이고 인간적이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왜 지속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이 사랑뿐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성숙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상대에게 지배당하려는 행태의 사랑과는 다르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 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 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간격을 지키면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두 개의 대나무가 묶여 있다.
서로간의 기댐이 없기에
이음과 이음 사이엔
투명한 빈자리가 생기지.
그 빈자리에서만
불멸의 금빛 음악이 태어난다

그 음악이 없다면
결혼이란 악천후,
영원한 원생동물처럼
서로 돌기 뻗쳐
자기의 근심으로
서로 목을 조르는 것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 같이
우리 사이엔 투명한 빈자리가 놓이고
풍금의 내부처럼 그 사이로는
바람이 흐르고
별들이 나부껴,

그대여, 저 신비로운 대나무피리의
전설을 들은적이 있는가?......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 같이
죽순처럼 광명한 아이는 자라고
악보를 모르는 오선지 위로는
자비처럼 서러운 음악이 흘러라......

- 김승희, <만파식적 - 남편에게>

 '영원한 원생동물처럼/서로 돌기 뻗쳐'사는 것이 앞서 말한 상대방을 소유하려하거나 상대방에게 지배 받고자하는 행태 등의 성숙하지 못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김승희 시인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을런지는 몰라도, 이 시(詩)에도 나와있듯 사랑으로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선 서로에게 성숙한 사랑이 요구된다.


 이러한 성숙한 사랑의 구성요소로 프롬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을 제시하였는데, 이 중에서 지식만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프롬은 '지식'이야말로 나머지 구성요소를 지탱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라고 여겼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상대방에 대한 단순 정보를 늘어놓는 게 아닌, 핵심을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때에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상대방의 단순한 습관이나 기호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진정한 사랑'을 행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자명하다. (오히려 상대의 정보를 늘어놓는 사람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더불어 지식을 통한 성숙한 사랑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도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사랑은 그 발현의 모습으로 보아 지극히 밖으로만 향하는 행위로 비추어질 수 있지만, 사실상 진정한 사랑은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로부터 시작되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으로 향한다. 즉, 나와 타인 사이의 간극(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다'라고 말하면서 타인과 나 사이의 간극의 심연을 강조)에서 나는 진정한 사랑을 이룸으로써  '나'의 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곧, 그리스 델포이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모토는 다름 아닌 사랑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지식(핵심을 파고드는)이 낳은 사랑이 다시 지식(자신에 대한)을 낳는다. 이는 겉보기에 간단한 결론이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긍정적인 연쇄는 일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와 상대방 그리고 지식과 사랑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해야한다. 그러한 까닭에 성숙한 사랑은 지속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사랑을 행한다는 전제 아래서, '받는 사랑'으로 성숙한 사랑을 이뤄낼 순 없을까. 한 마디로 대답해, 그럴 수 없다.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것을 주체적으로 벌이는 행위이어서 능동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수동적인 행태는 그 자체로 행위의 활동양식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나 활동이 가진 원래의 '동기'를 간과하고 활동의 외부적 목표에 몰입하여 이러한 기본 활동양식을 허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일한다. 이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열정의 노예이고, 그들은 쫓기고 있으므로 사실 그들의 활동은 '수동적'이다. 곧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이다.> 겉으로 보기에 활동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사람일 뿐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없다.


Munch, <The Dacne Of Life>, 1925

 그러므로 활동으로서 사랑은 '주는 것'이고 '참여하는 것'이어야지, 받는 것으로서 피난의 조치로서 행해질 수 없다. 사랑의 무대에 올라선 뒤에 관객의 박수만을 기다리며 머뭇거리기만해서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해도 사랑에 참여하면서 무작정 적극적으로 '주는'  일이 당장은 두려울 수도 있다.  물질 세계에 익숙한 우리에게 주는 것은 곧 잃는 것처럼 느껴지는 탓이다. 보통 누군가에게 무엇을 준다는 개념은 내가 갖고 있는 유형(有形)의 물질을 건네는 줌으로써 잃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사랑을 주는 일은 이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먼저 물질이 아니므로, 주는 것이 행위자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랑한다고해서 내가 가진 물건이 사라지지 않는다. 놀랍게도, 사랑은 오히려 획득으로 이어진다. 열렬한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어두운 밤도 밝혀지고 차가운 도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을, 몸을 에는 겨울바람도 사랑의 무대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을.(혹시 그런 적이 없다면 영화나 소설 등의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주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


-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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