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인연 더하기
안녕하세요.
우리의 만남은 흔한 그런 인사말로 시작했었던 것 같다. 저랑 동갑이라고 하셨나요? 한국인이라면 예외 없이 첫 만남엔 나이를 묻는다. 아 그쪽도 나이가 그렇게 되세요? 낯선 너의 모습을 눈에 익숙하게 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조금의 시간이라고 어림짐작한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다시 보게 되었고 자주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라고 멋쩍게 나눴던 첫인사는, 어둑한 새벽의 내 방을 밝힐 너의 통화나 카톡의 알람이 되었다 이제는.
대학교 때였다. 멋모르던 새내기 시절, 캠퍼스의 낭만은 그저 대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 거저 주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좋으니 야외수업을 제안하였다. 무심코 밟고 지나던 학교의 잔디는 그 위에 앉아보니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교수님과 학생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은 자리에서 내 시선은 갈 길을 잃었다. 헌내기라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옆사람을 향해 인사를 나누었지만, 나는 그저 빈 집의 강아지 같았다. 누군가 말 시켜주길 바라는 그런 강아지. 축 처진 내 꼬리는 어딜 향해서 흔들어야 할지 몰랐다. 어쩌면 누구라도 와서 내 꼬리를 잡고 흔들어주기라도 바란 걸까. 교수님은 그런 내가 조금 안쓰러웠는지, 내게 같이 맥주를 사러 가자고 하셨다. 벌떡 일어나 편의점까지 향했던 그 짧은 길에서, 교수님과의 대화는 수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00는 말이 없구나."
"네. 제가 원래 좀 낯을 가려서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낯을 안 가리는 건 아니란다. 하려 하지 않으면 아무도 네게 말 걸어주지 않는단다."
그래서였나. 맥주를 사고 돌아온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말 한마디로 얼마나 바뀌겠냐마는, 그날만큼은 낭만을 스스로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날 만났던 다른 선배들 동기들과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나눴던 대화는 어렸던 나를 많이도 취하게 했다. 낭만으로.
우리는 많이 어색했었다. 너는 초면에 조금 무례한 것도 같았고, 어딘가 나와 맞지 않는 것도 같았다. 조금, 아주 조금 지내온 것 같은데도 어느새 지금 너는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소주 한 병과 라면 한 그릇이면 새까만 밤을 알록달록 무슨 색으로든 칠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사이가 원래 이렇게 돈독했었나 생각해보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럼 우린 인연일까라고 손쉬운 말로 우리 사이를 갈음해보려는데, 인연이라는 간편한 말 뒤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쉬이 생각의 마침표를 내놓지 않는다.
우리 만남이 인연이라면, 결국 헤어짐도 인연인 것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한숨을 푹 쉰다. 인연이란 말로 뭉뚱그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데 묶기에는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나눴던 색색의 대화들이, 우리가 주고받던 소주잔들이 '인연'이라는 말로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흩어질 수도 있다니.
그러면 나는, 인연을 쌓고 쌓고 쌓아서 그리고 쌓고 쌓아서 흩어지지 않게 흩어져도 사라지지 않게 해보련다, 다짐한다. 어둑한 새벽, 네 방을 밝힐 내 메시지가 뜬금없어도. 3년 만에 네 휴대폰에 내 이름이 떠도. 내가 만드는 인연은 그런 것이다. 우리 만남이라는 가벼운 인연에, 인연을 더하고, 인연을 덧대고, 인연을 붙이고, 인연을 잇고, 인연을, 인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