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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Apr 26. 2017

눈물의 이유는 (2/3)

2.


 아내가 국악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대 위의 아내가 무슨 악기를 들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은 가야금을 곧잘 뜯을 것만 같았고, 두툼한 선홍빛의 입술은 피리에 어울렸다. 보일 듯 말듯한 속쌍꺼풀 위에 걸려있는, 짙고 또렷한 눈썹은 무대 중앙의 소리꾼이 어울렸다. 그래, 외모 하나는 분명히 무대 중앙에 어울릴 만큼 아름다웠으며, 국악에 어울릴만큼 단아했다. 그런데 아내는, 베이시스트였다. 베이스는 아내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악기였다. 왠지 아내는 둥둥둥 베이스 같이 낮고 음침한 소리보다는, 가야금이나 피리 같이 청명한 악기의 소리가 어울렸다. 아니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소리꾼이나.

 아무것도 몰랐던 퓨전 국악의 장르에는 가야금, 피리, 장구와 같은 민속 악기 말고도 베이스나 일렉 기타와 같은 악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내는 민속 악기를 다루는 퓨전 국악 연주자가 아니었다. 어렸던 아내는 그것이 마음에 조금 걸렸었나 보다. 괜히 민속악기 연주자들을 미워하기도 했고, 자기가 락밴드에 못 들어가서 여기 온건 아니라고 자주 이야기도 하였다. 나도 그런 말과 행동마다, 아내를 향해 고개를 항상 격하게 끄덕여주었다. 

 그날의 눈물도 아내 마음의 통로에 턱 하고 걸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내 거리 어딘가였다. 나와 아내는 이제야말로 홍보를 하기로 했다. 예술은 원래 외로운 거라고 했나. 날이 갈수록 음악은 좋아져도 사람은 모이질 않았다. 입소문이 알아서 해결해주리라 우리끼리 위로했어도, 돌아오는 건 무대 위에서 보이는 빈 객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전단지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의 사람들은 차가웠다. 벚꽃이 진 늦봄에 따스한 햇빛이 사정없이 정수리를 데웠어도, 사람들은 쌀쌀맞기만 했다. 보통 사람들은 외면하거나, 저리 가라고 손짓하든가, 또는 받은 전단지를 물 흘리보내듯이 바닥에 내려보내곤 했다. 전단지가 처음으로 내 발에 밟혔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쓴 소설이 읽히지 않는 기분과는 너무 다르게, 내가 만든 전단지가 내 발에 밟히는 기분은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밟혀 찢어진 것 같았다. 마음에 바르는 약이 없는 게 아쉬웠다. 두 장, 세 장 밟히고 나서는 약은 따로 필요 없었다. 찢기고 시린 고통이 쌓이자 곧 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같이 나눠주던 아내는, 앞만 보려 했다. 사람들만 보고, 전단지만 내밀었다. 벚꽃도 진 마당에 뒤늦게, 뒤따라 전단지들이 하나 둘 사람 손에서 진 탓인지 아내는 땅을 아예 보지 않으려 했다.

 해가 진 늦봄은 조금 쌀쌀했다. 전단지가 다 져서 앙상한 손에, 나는 떨어진 전단지를 줍고 주워 넣었다. 전단지는 다시 손안에 풍성히 열렸다. 아내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탓에 아내가 나누어주었던, 떨어진 전단지까지 내가 다 주웠다. 전단지가 만개한 내 손과는 달리 아내의 손은 앙상하고 싸늘한 늦봄의 벚꽃나무 같았다. 그리고 얼굴은 한겨울의 고목나무 같이 차갑게 굳어있었다. 무슨, 무슨 말이라도 들릴까. 우리 밥이나 먹고 나중에 또 할까. 아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다른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위로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죽은 고목나무에 달콤하고 따뜻한 물을 실컷 들이부어주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억지로 쥐어짜서 흘러나오는 말을 어지럽게 졸졸졸 흘려보냈다. 우린, 우리가 배 아파서 낳은 음악을 위해서라도 포기해선 안된다고. 포기하면 우리 음악을 안타깝게 보내야만 한다고 세상에 빛도 못보여주고. 내가 소설을 썼을 때 아무도 내 글을 읽어주지 않았을 때, 내 소설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그 소설에 네가 눈물을 흘려 생명을 불어넣어준 것처럼, 우리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사람을 언제까지고 찾아내야 한다고. 한 명이라도 더 들어줄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내 위로는 아내의 눈에서 곧장 흘러내렸다. 고마움의 눈물일까. 그것은 아내의 두 번째 눈물이었다.

 별 탈이 없었다. 말 그대로 그랬다. 딱히 우리의 음악이 실패하지도, 성공하지도 않았다. 가야금 하던 놈은 방송국 악단에 들어갔고, 나머지도 어떻게 어떻게  연주하고 살고 있댄다. 이 정도면 망한 예술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배고픈 거라는데, 배 안고프면 망하진 않은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점에서 아내는 성공한 예술인이 되었다. 방과 후 학교 선생님 정도면, 예술인으로서 대단한 성공 아닌가. 배 안 굶지 제때 퇴근하지. 괜한 라이브 카페를 전전할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나와 비교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이제 소설을 쓰지도 장구나 드럼을 치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찢어진 장구 짝처럼 살고 있다. 사무실에 나가 펜대나 굴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게 복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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