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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May 06. 2017

너무 한낮, 한밤의 연인

다미앙 매니블의 <공원의 연인, le parc>

- 본 영화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임.

- 예술영화 특성상 관람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해당 줄거리를 1에 적어놓았음.


1.

 우리는 정말 무지하게 어렸다. 무지(無知)하게. 어린 나이에 처음 너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흘려보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맥도널드 구석 자리나, 숱한 고시생들이 어슬렁거리는 골목이 우리의 이야기가 잠든 곳이다. 그곳에서 우린, 삶을 이야기했다. 살아온 날들과 살고 싶은 날들에 대해. 그리고 혹시 모를 우리의 미래에 대해 맑고 투명한 꿈을 꾸었다. 어떤 말을 보태고, 꾸미고, 매달아서 꿈은 부풀어올랐다.  그 가운데 우리 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흐릿한 배경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것이 영화 <공원의 연인>의 너무 한낮의 주인공인, 나오미와 막심의 사랑이었다.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진 녹읍의 공원에서, 아이가 공을 차고 젊은이가 뜨거운 땀을 흘리는 생동의 그곳에서 나오미와 막심은 사랑을 키웠다. 서로를 알아가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라 굳게 믿었다. 거침없었다. 아버지의 여성 편력을 흘기며, 우린 그런 연인이 될 리 없다 다짐했다. 길가는 아주머니의, "너넨 요새 애들 같이 싸웠다고 금세 헤어지지 마라."라는 말에  "네, 그럴 리 없어요."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사이였다.

 사랑으로 가득한 공원은 어느덧 어두워졌다. 막심은 집으로 돌아갔다. 공원에 남은 건 오로지 나오미 하나였다. 나오미의 휴대폰이 울리고, 막심의 이별통보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너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어."

 나오미에겐 급작스럽지 않았던 모양인지, 막심을 보낸 나오미는 이별 문자가 오기 전까지도 한참을 공원에 혼자 남아 있었다. 붉게 젖어가는 공원 위에 떠있는 하늘과 묵묵한 공원의 경계를 보면서 한참을 그렇게 막심이 떠난 자리만 보고 있었다. 이별통보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어스름이 빛을 잃고, 캄캄한 밤. 이별의 그늘은 짙게 내린 공원의 어둠보다 막막하였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나오미는 정처 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원에서 뒤로 걷는다. 뒤로 걸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막심과 걸었던 길, 뒹굴었던 들판 위를 뒤로만 걷는다. 뒤로. 뒤로. 뒤로. 이러면 너와 좋았던 그 시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좋았던 때 사진을 뒤지면서 그때를 떠올리는 사람처럼. 

 "마드모아젤, 마드모아젤."

 캄캄한 공원에 홀로 남은 여성이 공원 경비원 눈엔 이상하기만 하다.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러시는 거죠? 공원 문 닫았습니다. 나가주세요. 위험합니다. 나오미는 아무 말도 없이 뒤로만 걷는다. 공원 경비원은 계속 그녀를 쫓는다. 아무리 말을 걸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겁을 주어도 그녀는 대답 없이 뒤로만 걷는다.  경비원의 말은 너무나 무력하게 흩어진다. 막심의 달콤한 말이 아주 대낮에 그렇게 흩어졌던가. 사랑을 담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말들이 그렇게 무너졌던가.


 더 이상 경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처 없이 뒤돌아 뒷걸음질로 공원을 배회하는 그녀 앞에서. 그녀 앞에서 경비원은 이렇다 저렇다 시끄러운 말 대신 쿵후를 춘다. 말 그대로 쿵후라는 춤을. 한낮에 막심이 쿵후를 한다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했지만, 절대 보여주진 않았던 그 쿵후를. 나오미는 그제야 웃는다. 이별의 아픔에, 시간을 뒤로만 돌리고 싶어 무표정한 얼굴로 뒤로만 걷던 나오미는 경비원과 뛰논다. 어떤 말도 없이. 나이가 몇 살인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부모님은 어디 사는지. 머릿속에 잠깐 들렸다 희미해질 말들은 처음부터 묻지도 듣지도 않는다. 한낮에 막심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좋아하는 철학자나 전공 수업 얘기들 같은 부질없는 이야기는 이제 나오미에겐 중요하지 않다. 한밤에 이름 모를 경비원과, 온몸으로 즐길 뿐이다. 거리를 뛰고, 점프하고, 빙글빙글 돌다가 넘어지고. 그러면 다시 나오미와 경비원은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 말 따위, 필요 없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알듯이 한낮의 그들의 말은 어느 것도 대변해주지 않았었던 것이다. 마음도, 사람도. 


 그런 줄 알았다. 감독의 메시지는. 그런데, 경비원은 나오미를 보트에 태운다. 나오미는 웃는다. 경비원도 웃는다. 노를 저어, 호수 가운데로 가운데로 향한다. 나오미는, "집에 갈래요." 경비원은, 웃기만 한다. 다시 나오미는 "집에 갈래요." 경비원은 젓던 노를 놓고, 나오미에게 향한다. 화면에서, 나오미에게 향하는 경비원은 막심으로 바뀐다. 둘은 키스를 하고, 나오미의 거친 입술 놀림과 손은 보트를 뒤집기에 충분해 보였다. 둘은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흔들. 흔들.


 꿈. 깨어보니 나오미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막심이 떠난 곳만 바라보던 자리 바로 그곳에서 언제, 얼마큼, 어디서부터 잠들었는지 모르게 자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난 나오미는 벌떡 일어나 막심이 떠난, 혹은 떠났다고 잘못 알고 있는 그 길로 나오미도 떠난다. 집으로 가려는 것일까, 공원을 단지 나가는 것일까, 공원 안을 헤매는 것일까. 막심은 떠났을까. 경비원을 만났었나. 아니, 막심을 만나긴 했었을까. 어디서부터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극은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상영관을 밝힌다.


2.

 모순의 정답. 낮과 밤의 모순. 현실과 꿈의 모순 속에서 나를 찾는 과정이다. 나오미는 너무 한낮에 쏟아지는 말들에 사랑을 느끼다가, 너무 한밤에 샘솟는 몸짓에 '진짜'를 배운다. 그렇게 진짜라는 것이 쉬이 다가올 것 같았지만, 호수 위의 흔들리는 보트는 모든 메시지를 뒤집는다. 행동 역시 '나'를 담을 수 없는 것이었을까. 사랑은 또 무엇이 었을까. 결국 다 꿈이었는데. 한낱 꿈, 한 낮 꿈. 어쩌면, 꿈을 현실처럼 현실을 꿈처럼 사는 게 그게 인생이다. 아니라면 낮을 밤처럼, 밤을 낮처럼.

 하지만, 낮의 나오미와 막심은 너무 벌건 한 낮이다. 지루하고 긴긴 낮. 말(saying)만 내리쬐는 대낮 같은 사람, 사랑은 너무도 지루하다. 어쩌면 행동으로, 몸짓으로 날 사랑하는 게 더 와 닿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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