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논고>와 페미니즘
*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철학적 논고>)만을 사용함.
* 표현된 철학적 오류는 필자의 소양 부족임.
* 비판을 겸허히 수용함.
"우리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갖는 고정관념을 거부해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도 단호히 거부해야만 한다."는 셜리 치좀의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따르면 헛소리(nonsense)이다.
저명한 철학자 러셀조차, "비트겐슈타인은 나에게 학생으로 와서 동학이 되었다가 드디어는 나의 스승이 되었다"라고 술회할 만큼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사에 남긴 존재감은 묵직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비롯한 여성학, 윤리학 등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것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이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하여야 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담고 있는 <철학적 논고>의 결론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이것을 알아야 하는가.
세계는 언어로 표현되고 세계를 알기 위해선 언어를 제대로 아는 것이 선결과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을 분류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 세계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내 발 밑에 두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침묵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세계에 관해 생각하고 또한 말하는 이유로, 언어와 세계에는 공통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언어와 세계에 공통된 어떤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언어로 세계를 표현하고 그것을 세계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에 따라 세계에는 언어로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선험적인 질서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질서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세계'의 표현이다.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는 참과 거짓을 나타낼 수 있는 명제이다. 참과 거짓을 나타낼 수 없는 말은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참 거짓이 존재하는 명제들이 설명하는 세계를 통틀어 흔히 '자연과학'이라 한다. 이로써 자연과학을 표현하는 명제들은 소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철학, 윤리학, 미학, 종교, 사상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들은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도덕에서, 어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서양권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존댓말은 참인가. 생전에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살한 미술가의 미술 작품이 현재 수억 원대에 팔리고 있다. 그 미술작품은 거짓인가. 간단한 예로도 가치에 대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알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침묵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들은 언어 속에서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며, 그리하여 세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무의미(senseless)하든가 혹은 헛소리(nonsensical)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Wittgenstein's Conception of Philosophy을 우리말로 옮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발췌. 이하 <> 표시.)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러나 말해져 왔다. 말해져 왔을 뿐인데, 세계는 뒤틀리고 오해만 낳았다. 일례로, 말해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우리 한국땅에서 벌어진 6.25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말해지지 않았다면 꽃다운 삶을 살아갈 사람들 500만 명을, 말해진 것들이 이 땅에서 지워버렸다. 뿐만 아니라, 종교를 이유로 벌어진 911 테러, 더 과거에 십자군 전쟁 역시 그러한 예이다. (전쟁 발발은 원인에 대해서 관점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어찌 되었든 그 원인이 '자연과학'의 명제에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은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역시 '말할 수 없는 것'만을 주된 논의로 삼아왔다. 문두에 제시한 셜리 차좀의 격언을 비롯하여 다른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하는 바는 이른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 말대로라면 헛소리(nonsense)이다. 페미니즘의 헛소리는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페미니스트 개개인의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없기 때문에, 주된 양상만 살핀다.
페미니즘은 시대에 따라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다. 자유시장에 맞기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이 완전히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거쳐,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까지. - 소수의 다른 종류의 페미니즘은 논외로 하고 -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남녀 간의 무차별적인 평등보다 남녀 간의 차이에 주목한다.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남성들이 이제껏 누려온 자유로운 삶처럼 여성 역시 그에 걸맞은 자유로운 삶을 누려야한다고 요구한다. 다원화,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페미니즘이 그 모습을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역시 어쩌면 시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영합하여, 자신의 감정적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이다. 여성은 역사의 대부분을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왔다.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축적된 여성의 계급적 불평등은 자연스럽게 '여성' 집단 자체에서 오는 피로감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겪어야 할 사회적 불평등에서 '여성'이라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여성'은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축적된 계층적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분노로 표출된다. 그 흔한 예로, 페미니즘이라는 미명에서 행해지는 미러링을 들 수 있다.
미러링이란,
먼저 진실을 말하자면, 메갈리아 측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낸 개념조차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부적절하다는 것. 정상적인 미러링은 바로 역지사지. 잘못을 저지르는 자에게 거울을 갖다 대서,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 인식시키고 개선시키는 행위. 그러나 메갈리아가 행하는 미러링의 경우, 잘못을 저지르는 자를 보면 그 잘못을 그대로 저지른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법과 사회의 보편적인 동의가 없이 자신들이 당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무작위 대중들에게 갚음으로써 통쾌하게 여기고 정의를 구현했다고 주장하는 것.
-나무위키
미러링이 페미니즘으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성과가 있음에도, 인과적 당위성을 갖는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응보주의가 갖는 한계와 맥을 같이 한다. 사회공동체 분열은 물론이거니와, 미러링은 가해자의 행동을 똑같이 모방함에 따라 당사자인 '여성'을 사안의 요점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남혐'이 '여혐' 또는 여성차별과의 대결구조를 이루면서, 초점이 자연스럽게 '여성인권'에 대한 논의보다는 대결 자체에 맞춰지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그 사상 자체로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패션'으로 각광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떤 여성은 자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부르면서도, 뒤로는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틀에 맞춰 자신을 가꾼다. 이를테면 건강을 악화시킬 정도로 다이어트를 감행하여, 소위 남성들이 좋아하는 몸매를 만들어 그것을 SNS에 올린다. 뭇남성의 칭찬을 즐긴다. 몸매가 섹시한 - 남성이 요구하는 - 여성임과 동시에 자칭 페미니스트인 그 여성은 지적인 이미지까지 남성에게 어필한다. 반여성적 요구 - 남성적 요구 - 에 부응하면서도, 반여성적 요구를 타파하고자 하는 입장은 모순적이다.
어떤 남성은 자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부르면서, 다원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는 사람임을 뽐낸다. 그는 성(性) 차이에 대한 분별없이 단순히 여성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써 페미니스트의 소임을 일소(一掃)한다. 그 소임은 분별력 없이 비롯된 것이어서, 여성에 행해지는 시혜적 행동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남성은 이로써 여성들에게 본인이 바람직한 페미니스트임을 어필한다.
제시된 예들은 단순한 예이며, 이외에도 다양한 경우로 '페미니즘' 자체를 자신을 돋보이는 액세서리로 사용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페미니즘 양상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헛소리(nonsense)인 것은 분명하다. 페미니즘은 참 거짓을 논하는 명제를 포함하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이 아닌 페미니즘은 침묵하여야만하기 때문이다. - 페미니즘이 중구난방으로 단순 분노표출, 자기과시에 그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여한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무가치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침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한계를 언어로써 넘어서려 했기 때문이지, 그것이 가치가 없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은 선험적으로 헛소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넘어서려는 그러한 경향은 그 무엇인가를 암시해 준다. 다시 말해, 나는 이러한 인간의 경향을 가볍게 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에게 있어 사실들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세계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마음에 가까이 와 닿는다."
"나의 전반적인 성향, 그리고 윤리나 종교를 말하거나 기술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갇혀 있는 새장에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또 절대적으로 희망이 없다. 윤리학이 궁극적인 삶의 의미,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가치에 관한 그 무엇을 말하려 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인 한, 그것은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윤리학은 결코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어떤 경향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며, 나는 나의 삶을 위해서 그것을 경솔히 여길 수 없게 된다. ">
대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보여져야(shown)한다고 역설하였다. 페미니즘을 보여지도록, 침묵하여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삶의 의미는 명료하게 된다." 그리하여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엄밀히 하나의 물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물음을 야기시키는 과정 및 그것에 답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물음이 헛소리임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shown) 것이다. 이제 그의 처지는 보다 나아지게 되며 삶의 의미가 그에게 명료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어떻게 보여져야하는가.
보여지는 방식에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철학적 논고>에서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철학적 논고>의 관심사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shown)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페미니즘은 침묵해야만 하는가. 앞서 제시된 페미니즘의 양상처럼, 페미니즘은 이제껏 그것이 이루고자하는 가치의 뿌리가 아닌 흔들리는 가지의 그림자만 보고 '말하고' 있다. 이는 침묵되어야만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인본적 분별없이, '당위'와 '의도'만 들어찬 페미니즘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이라도 필연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회귀할테지만, 돌아갈 곳을 인지하는 보여줌(shown)과 시작을 알 수 없는 침묵(silence)은 나무의 뿌리와 그림자만큼 다르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과학적 - 생물학적 - 차이에서 출발해야한다.
'자연과학'상 차이를 말하는 명제는 참 거짓이 존재한다. 이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위성을 밝히는 과정 - 인권 신장 운동과 같은 - 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수반한다. 그러나, 차이의 명제를 인지하는 침묵 또는 이 침묵에서 발전한 보여줌(shown)은 삶의 의미를 명료화하기 수월하다.
페미니즘의 '말할 수 없는 것'만 보고 그것을 따라하는 행위는 삶의 의미를 명료화할 수 없을 뿐더러 침묵되어야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