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아무 문학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올 Jul 07. 2017

그럼 불이 저절로 나겠어요? (3/3)

3.


 "제가 그린 거예요."

 "이걸 다?"

 "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거짓말을 추궁해도 돌아오는 건, 변명이라는 걸. 울면서 애원하는 민정의 다짐도 다 잠시 뿐이라는 걸.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번 정답은 틀린 자리에서 새로 시작한다. 


 "저 고등학교 때는 미대를 가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그린 그림들이에요. 그런데 있잖아요. 살다 보면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진짜 열심히 그렸는데… 그림을 진짜 진짜 많이요. 정말, 밤낮없이 그렸거든요? 상도 받고 그랬는데. 그래 봤자 제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제 인생인데."


 성희의 눈과 마주쳤다. 관심 없던 성희의 눈이 내 눈에 들어왔다. 눈동자는 짙은 검은색이었다. 빛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그런 검은색. 처음 보는 짙은 검은색이었다, 민정 이후로. 분명히 내 눈을, 생각을 모두 삼켜버릴 듯한 눈은 민정이 밖에 없었는데. 성희는 그림이 걸려있는 사무실의 벽면을 보면서 이어서 말했다. 손 끝은 내 시선이 닿아있는 '불에 휩싸인 나'에 닿고 있었다.


 "오빠 이거 그림 마음에 들죠? 불이라는 게 참 묘해요. 막 그림은 하고 싶은데, 주변에선 하지 말래고. 그럴 때 정말 제가 진짜 불구덩이에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반대로 생각해보면요. 그렇게 답답하고 그러면, 그냥 다 불로 태워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싹, 다. 묘하죠. 요즘 같은 때도. 뭐 그래요. 답답하고. 좋아하는 건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성희는 '불에 휩싸인 나'를 번쩍 들고는 형광등 빛에 비추어보았다. 동작은 능숙한 살인자의 손놀림처럼 간결하고 덤덤했다. 이윽고 그 짙고 검은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어쩔 수 없대요, 엄마가. 교육과를 가래요. 그래서 수진이랑 같은 과에 온 거예요. 수진인 예쁘고, 착하고 참 좋은 애예요. 그죠? 그날도 오빠 술 많이 취했다고 걱정 많이 하던데. 수진이는 그래서 간 거예요. 그 불난 곳에. 여튼 전 그림을 아직도 안 놨어요.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좋아할 수는 있으니까. 좋아할 수는."


 좋아하는 그림을 대학에서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던 민정의 생각이 밀려왔다. 대학에 와서도 좋아하는 나를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던 민정의 생각이 밀려왔다. 중학생부터 나를 좋아했던.

 어느 날이었다. 신입생 무슨 모임을 하던 때였나. 술을 많이 먹었다. 너에게 전화가 왔고 아무 생각 없이 나는 받았다. 낯선 술이 입 안에 쓰게 남아, 어어하고 쌉쌀하게 답했다. 되돌아온, 휴대폰 구멍 타고 들려온 맛은 그보다 더 썼다. 우리 헤어져. 나 사실 너 좋아한 적 없어. 그냥 너 웃겨서 웃으려고 만난 거야. 그렇게 5년 만난 거라고 병신아. 이제 지겨워. 그만하자. 어?


 "그만하자. 어?" 이젠 성희에게 이유를 들어야겠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다.

 "오빠 수진이 좋아하죠? 얼마큼 좋아해요?"

 "그래서 거짓말 한 이유가 뭐야."

 "오빠가 좋아서요."


 히히히힉.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웃었나. 그림인가. 성희의 눈에 사로잡힌 내 시선을 그림에 돌렸다. 소리는, '불에 휩싸인 나'에서 들렸다. 그림 속의 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비웃는 것 같던 녀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입꼬리는 더 높은 곳으로 양 볼을 패었다. 그 벌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히히히히히히히힉. 크게 더 크게. 

 그리고 나를 삼킨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뒷걸음질 쳤다. 액자 안에서 물러설 곳은 없다. 액자 안에서 도망칠 곳은 없다. 불은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너. 너. 너. 시커먼 재가 된다. 그중엔 민정도 수진도 근우도 있었겠지. 불은 액자마저 삼키고 화염으로 이글거렸다. 그 속엔 오로지 웃는 나만 남았다. 나만. 웃음이 난다. 웃음이 나.


 그 뒤로, 성희의 작업실에 여러 번 가게 되었다. 밤이 늦어져 집에 못 돌아간 적도 더러 있었고, 낮이 되도록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수진의 메시지가 몇 번 휴대폰을 울리기도 하였다. 성희는 그럴 때마다 답장하지 말라고 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다. 잠자코 나는 부탁을 따랐다. 성희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꼭 민정을 닮았다.

 나는 민정이를 죽였었다. 몇 번이고 어떤 방법으로든, 내 안에서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민정이라는 사람이 아예 내 인생에서 없어져야,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존재 자체를 지울 수 있다면, 소주를 몇 병이고 들이부어 닦아 없애고 싶었다. 총을 들고 과녁판을 쏘면서도 민정을 생각했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던 네 입, 거짓말하는 네 입.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겼을까. 어지러웠다. 귀를 찢던 총소리는 어느새 멎었다. 내 주변에 빨간 모자를 쓴 놈들이 나를 빙 둘러쌌다. 손들이 내 팔과 다리를 찢듯 당겼다. 네 입 대신, 내가 든 총은 내 입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민정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았다. 내가 죽였던 그녀가. 마치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행복했다.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때의 화상(火傷)을 잊을만큼. 


Edvard munch, <Madonna>, 1894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 불이 저절로 나겠어요? (2/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