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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올 Jul 06. 2017

그럼 불이 저절로 나겠어요? (2/3)

2.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커리와 난, 쌀밥이 놓인 테이블 위에서 수진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비친 이름은 근우였다. 마주 앉은 수진은 황급히 휴대폰 화면을 손으로 가리면서, 오빠 잠깐만요 하고는 음식점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수진이 떠난 빈자리엔 비참함만이 대신 앉아있었다. 그 뒤론 비참한 음악만 흘렀다.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사용된 피아노 음악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삶이 인간극장보다 더 극장 같았다. 군대만 다녀오면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매일매일을 오늘처럼 웃는 얼굴로 수진을 속일 순 있었지만, 울고 있는 나를 속일 순 없었다. 내 깊은 곳에선 어서 그 악만 남은 질문을 뱉으라고 아우성 댔다. 도대체 그날 밤 왜 울었고, 근우와의 사이는 뭐냐고. 직접 말해달라고.

 수진은 오지 않았다. 대신 수진의 메시지가 왔다. '오빠, 저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계산은 했어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다가가면 사라지고, 잡으려 하면 흩어지는 게 내 운명 같았다. 군대를 다녀오면 다 괜찮아질 거란 위로도 이제 보니 다 엉터리였다. 변한 것은 사람들뿐이지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항상 나를 둘러싼 상황은 득달같이 나를 노려보다가도, 다가가는 내 한 걸음에도 자취를 감추고 약만 올려댔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난날, 민정이 나를 그런 식으로 버릴 수가 없었다. 매몰차게 그렇게 나를 떠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시간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군대 다녀오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주변의 걱정이 그나마 피터진 가슴을 위로해주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정말 이제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성희를 만났다. 이제껏 연락 없던 성희는, 오늘에서야 내게 연락한 것이다. 나는 말이나 들어보자고 만나기로 했다. 해가 진 어둑한 놀이터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어울리지 않은 탓인지,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 어둠에 어울리는 건, 실패한 어른들의 담담한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성희는, 첫마디를 뱉었다.


 "잘 지냈어요? 다친 덴 다 나았어요?" 성희는 무미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자기의 생애에서, 아니 이 세상에 일어난 적 없다는 듯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도대체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근우와 수진이는 무슨 사이인지. 머릿속에 복잡했다. 그리고 넌 뭔지.


 "음, 좀 걸어요." 말 없는 내가 갑갑했는지, 성희는 주머니에 꽂힌 내 손을 끌고 거리로 나갔다. 대학가의 거리엔 연인들이 많았다. 연인이 마주 잡은 손은, 지금 내가 잡혀있는 손과 비교돼 보였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성희와 내 손에서, 엉켜있는 의문 속에서 먼저 끄집어낼 말을 나는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성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걸 알았다. 성희에 대해서 아는 건, 전공과 이름뿐이었다. 성희에게 물어볼 많은 질문 중에, 성희를 묻는 것 한 글자도 없었다는 게 어딘가 이상하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데.


 "오빠, 안 바쁘죠? 저랑 어디 좀 안 갈래요?"

 "어디?"

 "있어요. 따라와 봐요."


 성희는 사무실이 모여있는 동네에 있는, 낡은 건물의 반지하로 나를 데려갔다. 성희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 그곳에서, 닫힌 문을 열고 형광등을 켰다. 싸구려 형광등 조명으로 밝혀진 거기엔 온갖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이젤 위, 선반, 벽면 할 것 없이.


 "놀랬죠?"

 "이거 그림 다 뭐야?" 빼곡히 쌓인 질문들을 잊은 채, 먼저 그림을 물었다. 그림은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다. 우거진 그림이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색채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기꺼이 죽고 싶을 정도로 쓸쓸한, 피보다 검붉은 가을 숲처럼.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불에 휩싸인 사람의 그림이었다. 그림 속의 사람은 불 한가운데에 있었다. 주변엔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 불에 싸인 것이 꼭, 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벗어날 수 없는 불행에 둘러싸인 나. 어느 누구를 좋아할 수도 없는,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불지옥. 괜히 화재 때 다친 발목이 그리고 숨통이 웅숭그렸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그림 속에 나는 웃고 있었다. 불에 타 죽게 생겼는데 뭐가 그리 신났는지, 히죽대는 표정이었다. 벗어날 요량이라도 있는 거냐, 그림의 나. 이제는 도망갈 곳도 없는데, 수진이 없고 민정이 없는 곳은 이젠 내게 남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면 그림 속에서 웃고 있는 넌, 불구덩이를 벗어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나를 비웃는 거다. 이 병신 같은 세상이 나를 비웃으려고, 죽은 민정이 성희를 내게 보낸 것이다. 민정이도 그림을 그렸었다. 민정은 내게 미대가 있는 대학교로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는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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