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은 어떻게 다른가?

by 와이아트



일주일 안에 친해지는 현대미술 (금요일)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본 적 있는가. 마트 진열대의 상자와 구별되지 않는 그 물건이, 미술관에 들어오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fb44ebe9eb457ceca55c271bf96e8176f63aa789-700x525.png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Brillo Box)>, 1964.


겉모습은 동일하다. 그러나 하나는 유통망에서 소비될 상품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와 담론, 전시와 비평, 작가의 의도와 관람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 작품이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불러온 것일까?


우리는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을 봤을 때 ‘이게 무슨 예술이냐’라거나 ‘나도 그리겠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예술의 정의가 완전히 달라졌다면 어떨까? 미술의 개념이 바뀌었다면 우리의 이해 또한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이라는 개념을 알면 현대미술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미술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술의 종말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보고 예술 개념 자체가 변화했다고 주장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아서 단토(Arthur C. Danto, 1924-2013)다. 그는 이 작품을 두고 ‘예술의 종말’이라고 표현했다.


aw_1064_300dpi.png 앤디 워홀, <브릴로 박스>, 1968. (출처: 타데우스 로팍)


그런데 여기서 ‘예술의 종말’이라는 표현을 잘 해석해야 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미술 작품의 제작과 생산이 더 이상 불가하다거나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예술 ‘개념’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美)라고 하는 예술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지 않게 된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단토에게 예술의 종말이란 “예술을 규정하는 선험적 조건들이 사라진 시대로서 그 어떤 것도 시각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 해방의 시대이며, 따라서 이것은 예술의 ‘중지’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확장’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단토의 중요한 주장이 나온다. 이제 예술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에 의미를 구현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에는 ‘예술계’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술계


단토는 무엇이든 가능해진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것이 미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예술계(The Artworld)’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보는 것은 눈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무엇 - 예술 이론의 분위기와 예술사의 지식, 즉 ‘예술계’를 요구한다.”
- 아서 단토, 「예술계」(1964) 中


단토는 ‘예술계’가 개별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누군가가 푸른색 물감이 번진 것을 가리키며 “그것은 하늘이다”라고 말하거나, 무릎을 꿇은 배우를 보고 그를 ‘햄릿’이라고 부르고, 음악의 한 구절을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라고 규정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즉, 예술계에서 규정된 해석에 의해 어떤 물리적 대상이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음을 뜻한다.


만약 무언가가 예술 작품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가령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카텔란의 작품에 대해 아무도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았다면, 그저 슈퍼마켓에서 파는 바나나가 된다는 것이다.


단토는 <브릴로 박스>가 1964년에 뉴욕의 갤러리에 등장했기 때문에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 만약 같은 작품이 1860년대 파리에서 전시되었다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고 본다. 즉, 어떤 대상이 예술 작품이 되려면 그 작품이 속한 사회에서 예술로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몇몇 사람이 담합해서 예술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물을 실재적인 세계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예술 세계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몇 사람의 합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지정하는 것은 단순히 선언을 통해 존재할 수 없고, 반드시 근거의 담론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토가 ‘예술계’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 시대마다 예술 작품을 가능하게 만드는 각기 다른 예술 이론들이 있고, 이 이론들에 의해서 예술 작품의 세계가 구성된다는 점이다. 무언가가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가 그것을 예술로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즉 단토는 예술계를 역사적으로 체계화된 예술 작품의 세계로서 생각했고, 예술 작품의 세계는 또한 역사적으로 체계화된 이론에 의해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토의 ‘예술의 종말’이라는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고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문화현상을 일컫는다. 급격한 사회 변화로 많은 것들이 변하자, 예술 측면에서도 이에 대한 저항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거대 서사와 거대 담론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해체’하려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스크린샷 2024-12-10 오후 8.59.56.png 신디 셔먼, Untitled #424, 2004. ⒸCindy Sherman


포스트모더니즘을 요약할 수 있는 단어로는 ‘다원주의’를 들 수 있다. 서로 다른 양식들이 혼합하면서 다양한 시각들이 광범위하게 인정받게 된 것이다. 모더니즘이 구축했던 엄격한 권위를 거부하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는 주류에 의해 억압되었던 주변부의 다양한 목소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과 같은 폐쇄성에 도전하는 예술이 등장했다.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앤디 워홀의 ‘팝 아트’도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다. 대중문화를 뜻하는 ‘팝’을 순수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온 것이 바로 ‘팝 아트’이기 때문이다.


단토는 1962년 파리에 살고 있을 당시 미술 잡지 ‘아트뉴스’에 실린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키스>를 보고 상당히 놀랐다고 회고한다. 단토는 놀란 이유에 대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만화 이미지와 크게 구별되지 않았을뿐더러 이 작품에 대해 진지한 비평이 길게 실려있기 때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팝 아트를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예술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뒤집는 시도가 나타났으며, 이는 동시대 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


결국 아서 단토가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 시대에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사적 틀이라는 제한에 갇히지 않는 예술이 이제는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단토는 이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는 예술 작품이 무엇처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구속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 어떤 것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종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이며, 현시대 예술가들에게는 과거의 여러 예술 형식들을 차용하여 예술가 자신의 표현적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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