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가난해도 비참하지 않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책
“선생님, 이웃에 사는 할머니께서 목을 매려고 하니 빨리 좀 와주세요.” 한 할머니가 황급히 병원에 찾아와 말한다. 의사는 서둘러 왕진을 나선다. 간암이 뼈로 전이된 혼자 사시는 할머니는 입원비를 내고 항암제를 맞느라 모아둔 돈을 다 써버려서 목을 매려 했다.
집을 찾아온 의사는 집안에 그림이 많이 걸려있다며 관심을 보인다. 할머니는 자신이 그렸다고 말하고, 정말 잘 그리셨다는 대화가 오간다. 돈이 없다고 하셨는데 통장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의사가 묻는다. 연금 수입과 월세 지출 등을 확인한 의사는, 한 달 생활비 4만2,466엔으로 마지막까지 고통 없이 지내실 수 있게 보살펴드릴 테니 안심하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잘 자고 몸와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잘 웃는 것만 꼭 지키시라고 당부한다.
고맙다고 말한 할머니가 잠시 후 부끄러워하면서, 주치의가 술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끊은 상태라 웃으며 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의사는 술 먹고 웃으며 살면 된다고, 지금 집에 술이 있느냐고 묻는다. 의사와 간호사, 할머니가 같이 와인잔을 들고 건배를 하며 웃는다.
조금 전에 목을 매려 했고 어깨가 늘어져 있던 할머니는 그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마지막 시간,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원받았고 편안하게 지내시다가 집에서 눈을 감았다. 의사는 할머니 본인이 원하는 죽음, 만족하는 죽음, 납득하는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없이 홀가분한 죽음』 3장 ‘혼자 살아도, 돈이 없어도 집에서 죽을 수 있다’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노인 자살율과 빈곤율 OECD 1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하루 평균 10명 정도의 노인이 가난, 질병, 외로움 등에 짓눌려 자살을 선택하고 있다. 그들 모두의 행위를 ‘강압’이 아닌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조금 전에 목을 매려던 할머니가 어느새 건배를 하며 행복해하는 할머니가 되듯,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관계와 환경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예민하고 약한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노인 자살율 1위라는 불명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책을 보면서 우리가 가진 늙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의 공포는 늙음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공포보다는, 그것을 사회가 취급하고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공포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어떤 취급을 당할까를 떠올려보면, 늙고 죽는 일이 끔찍하고 비참하기만 하다. 문제는 그런 끔찍함과 비참함을 내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늙는 게 싫고 혐오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늙는다.
지난 5월에 방송되었던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3부작 중 3부의 제목은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두려운’이다. 영상 앞부분에 아마도 모녀 사이인 듯한 둘의 대화가 나오는데, 엄마는 어떻게 죽을까를 많이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갑갑하다고, 너무 오래 산다고 이야기를 한다. 생각해봐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보니 ‘대책 없는 장수’가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젊음과 건강, 능력과 돈이 중심인 세상에서 약하고 늙고 죽어가는 자의 자리는 없거나 거추장스럽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동의하며 살아온 삶의 방식이 나에게도 되돌아온다. 두려움과 공포와 비참함으로. 이것은 개인이 몇억, 몇십억의 돈을 쌓아둔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돈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살아온 협소하고 궁색한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또한 매우 객관적인 듯한 ‘능력’이라는 개념 역시 편협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몰아내는 ‘나쁜’ 말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 의심스럽다.
지난 7월 10일, 65세 이상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런 추세라면 늦어도 내년 전반기에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이다. ‘빨리 빨리’의 나라 한국은 고령화 속도도 OECD 1위이다. 초고령 사회란, 5명 중 1명은 65세 이상인 사회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늙음과 죽음을 추방시켰던 우리의 문화를 다시 돌아보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살다 갈 수 있는 세상을 향해야 할 시기이다.
하지만 여기저기 넘쳐나는 구호에 비해, 살던 집에서 마지막까지 돌봄 받으며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방치보다는 관리’를 택하고, 노인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끌려가듯 병원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죽기도 전에 이미 ‘삶’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거의 빼앗긴 채로 괴로운 ‘몸부림’ 속에 죽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 ‘존엄’은 끼어들 틈이 없다.
『죽음을 배우는 시간』의 저자 김현아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존엄사를 외치면서도 비참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제도의 문제보다는 죽음을 앞두고 집이 아니라 병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라고 한다.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의 저자이자 왕진의사인 양창모는 대부분 집에서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죽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 국민 10명 중 6명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죽기를 원하지만, 실제 사망자 10명 중 8명은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게 현실이다.
절망 속에 목을 매려던 할머니를 보면, 노인 돌봄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는 일본도 모두가 편안한 노년을 보장받는 사회는 물론 아니다. 서로의 안부를 살피며 살아가는 이웃이 마침 위험한 순간을 발견했고, 마침 마을에 생명을 귀히 여기는 왕진의사가 있었고, 5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도 집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찾아낸 것이다.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들은 이런 ‘마침’들이 만나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그런 ‘마침’의 기적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가끔씩은 일어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잔물결이 되어 우리 사회의 곳곳으로 퍼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