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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토끼 Oct 18. 2019

1. 같은 장소, 다른 기억

제주 용눈이오름에서 만난 대찬 바람

  나는 제주를 참 좋아한다.

  해외출장이 너무 잦아지면서 쉴 때는 멀리 나가고 싶지 않고 싶어지자, 제주는 나의 (국내) 도피처이자, 내가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아기자기 예쁜 카페와 평화로운 마을과 정갈한 맛집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는 곳. 늘 묵는 ‘플레이스캠프 제주’에 짐을 풀고,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면, 제주는 나에게 완벽한 시간이다.


  지난 1월에는 무려 1박 2일로 도망치듯 제주로 떠났다.

  떠나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아서.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 알랭드보통 <여행의 기술>


  나보다 먼저 제주에 빠져들었던 친구는 나에게 ‘용눈이오름’을 추천해줬다. 꼭 다녀와, 약간의 등산과 함께 정말 예쁜 곳이야.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효리가 다녀가서, ‘이효리 오름’으로 유명해진 곳이라 했다.)


  1월의 제주, 그리고 용눈이오름. 겨울이니까 약간 쌀쌀했고, 저 위까지 오르는 길도 그리 힘들진 않았다. 오름에 올랐고, 와, 하고 감탄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발을 조금만 떼고 몸에 힘을 빼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내 인생 최고로 센 바람을 만났다.


  그래도 여기 왔으니, 한 바퀴 돌고 가야지. 세찬 바람을 견디며 빠르게 걷는데 그 꼭대기엔 나밖에 없었다. 뒤에 오고 계시던 아주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대로 바람에 훅- 하고 날아가 버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죽어버리면, ‘제주에 놀러 왔다가 오름에서 떨어져 사망한 30대 여성’으로 기사는 한 줄 날려나. 그러니까 오름에 오를 땐 거센 바람을 항상 조심하시라고, 누가 나를 예로 들며 안내라도 한마디 해 주려나.


  한동안 휘몰아치던 바람은 다시 잠잠해졌다. 햇살이 따사로워졌다. 이제야 오름에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 올라오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바람을 만났었는지 모르겠지. 붙잡고 막 설명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방금까지 저 진짜 죽을 뻔했거든요. 저마다 인생을 휩쓸고 가는 바람을 다른 사람이 알기란 쉽지 않은가 보다. 가만, 내 인생 가장 세찬 파도도 스물한 살 이 곳, 제주 중문 바다였다.


  친구의 추천으로 오른 용눈이오름이었는데, 나의 기억 속엔 ‘죽을 뻔했던 바람을 만났던 오름’으로 남아있다, 너의 기억엔 이 곳의 멋진 뷰(view)가 있겠지만.


  같은 곳, 다른 기억. 새삼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 용눈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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