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앞에서 당당히(?) 지각한 썰
회장님, 쏴리~
우리 회사는 꽤 큰 회사였다. 회사의 회장님을 만나는 자리는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당시 나는 프로젝트가 인천 송도였기 때문에, 매주 월요일에 캐리어를 끌고 송도에 가서 일주일을 지내다가 금요일에 올라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캐리어를 끌고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그 날은 시상식이었다. 나는 정말 감사하게도 우수직원상 같은, 회장님이 주시는 상을 받게 되었다. 전체 3-4천 명 되는 직원들 중에 5명 남짓의 개인에게 주어지는 귀한 기회였고, 아직 5년 차인 내가 그런 상을 받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그래, 캐리어도 끌고 가야 하고, 중요한 날이니, 택시를 타야지. 평소보다 40분이나 일찍 출발하여 나는 우아하게 입성하고 싶었다. 최연소 수상자답게, 멋지게, 여유 있게. 입사 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던 회장님과 임원분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날이었다. 우리 본부장님들도 나를 보며 자랑스러우시겠지.
그런데, 중요한 날엔 절대 택시를 타면 안 된다.
그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 솔직하게 택시에서 기절할 뻔했다. 사고가 났는지 동부간선도로는 꽉 막혀있었고,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으악, 아저씨, 제발. 어떻게 안될까요. 저 좀 살려주세요. 나는 평소에 지각을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지각을 하지 않으려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해왔고, 실제로 지각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 왜 하필!!!!!!! 머리가 어지럽고, 땀이 삐질 났다. 나름 멋지게 준비하고 나온 나의 화장은, 하하하, 무너지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택시에서 내려 힐을 손에 쥐고 달려가는 주인공들이 생각났다. 너무 고속화도로 한가운데여서, 내릴 수도 없었다. 암, 이것이 현실이지.
행사 30분 전까지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길이 뚫리면, 택시가 슝- 하고 달려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래, 나에게 이런 날 지각을 하는 불상사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세상에 못하는 게 어딨어.
10분 전,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앞이 캄캄했다.
인사팀 : 어디쯤 오세요?
나 : 아, 하하. 제가요, 택시 타고 가고 있는데, 사고가 났는지 정말 차가 움직이질 않아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아흑. ㅠㅠ
인사팀 : 아....... 수상자들 다 오셨고, 곧 회장님도 오실텐데, 일단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오세요.
전체 임원회의 중간에 시상식을 할 예정이라 시상식까지 시간이 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시간 전엔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설마, 회장님 오시는 자리에 지각을 하겠어.
행사 시작 시간 9시. 나는 9시 반이 되어서야 시상식 장소에 도착했고, 행사 장소엔 아무도 없었다. 도착하니 힘이 쭉 빠졌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가봐야 했다. 쭈글쭈글한 얼굴로 울상을 하고 프론트에 있는 분께 “저기... 제 이름은 000이고요, 제가 오늘 수상자 중 한 명인 데요.”하고 말하니, (내가 느끼기엔) 너무 차가운 얼굴로 ㅠㅠ 그분은 나를 다른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작은 회의실에 혼자 덩그러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기다리는데, 속이 메슥거리고 신물이 올라왔다. 이게 무슨 일일까, 정말.
부대표님이셨나, 전무님이셨나, 갑자기 누군가 오셔서 상을 주셨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누구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래도 시상식처럼 상장 내용도 읽어주시고, 축하해요, 수고했어요, 하며 사진도 같이 찍어주셨다. 그냥 그렇게 3분도 안되어 작은 시상식(?)이 끝났다.
왜 늦었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바쁘실 텐데 다시 와서 시상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인사팀 직원분들께도. 나 때문에 두 번 일하시게 하고.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지각은 지각이고, 그 행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한 명은 누구야? 뭐야?' 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
프로젝트를 하는 송도로 또다시 두 시간 남짓 걸려서 이동을 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상 잘 받았어?” “우와, 대단한데~” “축하해~” 하면서 다들 관심을 보여주셨다. 나는 차마, 지각해서 회장님과 다른 임원분들을 만나지도 못했고, 따로 살짝 상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오전 대여섯 시간 동안 나는 탈탈 털려서 어딘가에 푹- 쓰러지고 싶기만 했다.
그땐 정말 미친 듯이 아찔하고 토 나올 것 같아서 흑역사로만 가지고 있던 기억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사실 별 일도 아니었다. 택시를 탄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내가 일부러 늦은 것도 아니고, 난 솔직히 정말 최선을 다했다. 잘하려던 것이 오히려 이런 실수를 불러온 것이었던 것뿐이다. 회장님은 당시엔 좀 불쾌했을 거고, 임원들도 뭐지? 싶었겠지만, 직원 하나 정도 이런 실수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뭐야?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예전에 어느 유머 게시판에서 봤던 '직장인의 흔한 지각 사유서'가 생각났다. 나도 '본인의 지각은 중요한 행사이기에 정말 일찍 도착하고자 택시를 선택했던 판단 오류와, 출근시간에 과도하게 꽉 막힌 서울 교통시스템의 비효율성과, 그런 교통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내비게이션의 데이터 오류로 인해 빚어진 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지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각한 사람의 마음은 조금은 옹호하고 싶다. 1분마다 시계를 보며 얼마나 아찔해하며 토할 것처럼 달려오고 있는지, 그 마음을 생각하면, 나는 지각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다. 지각은, 충분히 용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회장님, 쏴리~ 진짜 진짜 미안했어요!
(커버 이미지: 뉴욕 맨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