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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토끼 Oct 25. 2019

내 워라밸은 누가 지켜주나?

장 대표, 너나 잘 챙겨  (퇴사하고서도 워라밸을 논하다니)

  워라밸 없이는 일하지 않겠다.

  경영 컨설턴트는 워라밸이 없는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다. 저녁 7시가 되면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데, 저녁을 먹고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치즈가 듬뿍 뿌려진 느끼한 파스타, 싱싱하게 살아있는 특초밥, 빨갛게 육즙이 흘러나오는 소고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곱창전골...  저녁은 충분히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낮 시간의 업무 고통을 잊을 정도로 맛있게 먹어야 한다. 곧 2라운드가 시작되니까.


  야근 때문에 퇴사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매일 야근과 함께 열네다섯 시간을 일하다가 컨설팅 퇴사 후 옮긴 회사에서 주 52시간 이내의 업무를 하니, 조금 살 만했다. 이래서 워라밸 워라밸 하는 거구나. 나는 빈 시간을 나만의 시간으로 채워서 야간 대학원을 다니고, 청소년 진로강의를 다니고, 운동도 하고, 아는 선배 일도 도와주면서 온전히 채웠다.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이제 워라밸 없이는 일하지 않겠다, 고 생각했다.


  지금은 또다시 퇴사하고, 백수가 되었다. 하루 24시간 1,440분을 쪼개서 쓰던 내가 갑자기 ‘쉬자’고 집에 들어앉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울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프리랜서 일을 구하고, 구직활동도 하면서, 또 작가를 하겠다며 글을 쓰면서 잠을 줄였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그 말이 정답이었다.  


  아, 졸라 바쁘구먼.




  브런치 김은경 작가님의 글쓰기 강연에 와서 그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가 회사를 그만뒀던 시절에 자신을 ‘인생 CEO(김 대표)’라 칭하며 썼던 글이었다.


‘내 안의 김 대표 성에는 차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조금이라도 쉬려고 하면 잡은 고기에 만족하지 말고 더 대단한 일을 해내라고, (...) 채찍질했다.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뭔가를 잘 해내면 내 안의 대표는 잘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며 심드렁하게 말했고, 실수하거나 잘 못 해내면 도대체 뭘 한 거냐며 윽박질렀다. 절대 저렇게는 되지 말라고 생각했던 최악의 상사, 그게 바로 내 인생 CEO의 실체였다’
- 김은경 작가, 대학내일 기고글


  나는 7년의 시간을 ‘경영’ 컨설팅을 했고,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며 ‘워라밸’을 논했지만, 정작 나 스스로의 워라밸을 돌아보지는 못했다. 컨설턴트이면서 기업의 전략을 평가하고, 운영 효율성을 점수화하고,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매번 찾아왔지만, 나의 전략적 방향성과 운영 효율성을 분석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젠장, 전략적 방향성과 운영 효율성이라니, 정말 징그럽게 컨설턴트스럽군!)


  나는 김은경 작가님처럼 ‘내 안의 장 대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나는 매우 진지했다.


<체크리스트>

- 장 대표는 직원이 미래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는가?
- 장 대표는 직원이 잘했을 때 적절한 금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가?
- 장 대표는 직원이 번아웃되지 않고 동기부여될 수 있도록 적절한 복지를 제공하는가?
- 장 대표는 직원 만족도를 정기적으로 진단하는가?
- 장 대표는 직원이 행복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주고 있는가?

(진짜 최악, 체크리스트마저 컨설턴트 나셨군!)


  컨설턴트랍시고 기업의 문제를 제 일처럼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좋은 동료가 되겠다며 직장 동료들 후배들 걱정을 다 들어주려고 오지랖 부리더니, 꼴좋다. 본인의 경영상태는 C였다. 상사로서도 최악!  


  내 워라밸은 누가 지켜주나? 결국은 나 스스로 지켜야 하는데, 남 참견하느라 오랫동안 나를 지켜본 적이 잘 없다. 일과 삶의 경계에서, 또 달리기와 휴식의 경계에서, 불만족과 칭찬의 경계에서 진정으로 ‘밸런스(균형)’을 맞춰보려고 각각의 단면을 바라본 적이 참 없었다. 장 대표, 직무 유기다.  


  그렇지만, 아직 늦지 않았지.

  조금씩 개선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 하고 싶은 일은 해야겠지만, 잠은 너무 줄이면 안 되겠지. 스스로를 너무 채찍질하지 말고, 잘했을 땐 스스로 칭찬도 해 줘야겠지, 또 가끔은 나를 위한 사치도 좀 부려주면 더 좋겠지. 너무 달린다 싶을 때는 잠시 휴가를 보내줘야지, 휴가를 못 쓰면 돈으로도 못 받으니까. 분기별 한 번쯤은 스스로 만족도를 체크도 해 보고,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생각도 (잘 안되지만) 가끔은 해 줘야지.


  <멜로가 체질>에서 회의를 하던 주인공들이 월미도로 훌쩍 떠나는 장면이 있었다. ‘피곤하지만, 행복하다!’ 진주(천우희 분)가 외쳤던 그 대사처럼, 나도 피곤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게 다시 한번 나를 경영해보기로 했다.


  벌써부터 아주 조금은, 행복해지려고 한다.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



추신: 글의 제목도 김은경 작가님 강연 실습 시간에 만든 것이다. 저녁밥도 못 먹고 온 강연이었지만, 글도 인생도 알려주신 작가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고 싶다.



(커버 이미지 : 춘천 최애카페, Earth 17.  무의식적으로 워라밸을 지키려고 제주로, 춘천으로, 세비야로, 그렇게 나는 떠났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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