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버텨봐야 하는 이유
얼마 전 후배 A에게 연락이 왔다.
“언니, 저 퇴사를 하게 되어서요, 점심 같이 하실래요?”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좋은 또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한다고 했다.
“근데 너 신입사원 때부터 퇴사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더니, 꽤 오래 다녔다? 하하하”
컨설팅 회사의 근속연수는 약 3-4년. 7년이나 회사를 다닌 후배는 어느새 장기근속자가 되어 있었다.
“정말 신입사원 때는 저랑 안 맞는 일인 것 같고, 욕심은 있는데 결과도 안 나오고 너무 힘들었거든요? 근데 그때 너무 힘들었어서인지, 그다음부턴 조금씩 상황이 나아지는 느낌이더라구요.
3-4년 지나니 인정도 받기 시작하고, 그래서 오래 버틸 수 있었나 봐요.”
경력직으로 이직할 땐 어느 정도 특정한 분야에 경력과 전문성이 쌓여야 회사들에서 좋아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근무 연한이 필요하다.
보통 ‘나 이 일 좀 했어요.’ 하기 위해서는 최소 2-3년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후배 A는 잘 버텼기에, 7년의 컨설팅 경력을 인정받고 성공적인 이직을 한 셈이다.
최근에 또 한 명의 신입사원 후배 B가 나에게 어두운 얼굴로 상담을 요청했다.
“제가 컨설팅이 잘 맞을 줄 알고 왔는데,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정말 프로젝트가 너무 많이 힘들었어서, 다음 프로젝트는 생각만 해도 무섭고.
컨설팅을 그만 해야 하나 싶어요.”
모두의 회사 생활엔 울고 싶은 시기가 있다.
나도 그랬다.
3-4년 차 컨설턴트 시절에 만난 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한국 대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서 사업을 확장하는 전략을 짜는 프로젝트였다. 전략 프로젝트이다 보니, 고민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퇴근은 기본이 새벽 2-3시였고, 아침에도 일찍 나갔어야 했다. 그보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매니저의 리뷰였다. 내가 만든 PPT의 논리와 구성에 대해 검사를 받는 시간인데, 당시 매니저가 기대했던 수준에 내가 한참 못 미쳤었는지 욕을 먹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한바탕 욕을 먹고 나면 나의 자존감은 콩알만 해지고, 절로 눈물이 났다.
그때의 목표는 짧은 프로젝트 기간(3개월) 내에 이 사람에게 ‘그래도 괜찮네!’ 하고 인정을 받아보는 것이었다. 3개월은 정말 개인 생활도 없이 프로젝트에 올인하며 흘러갔고, 어느 회의 시간엔가, ‘샘은 그래도 이제 많이 좋아졌네!’ 하는 나름의 칭찬을 받는 단계가 되었다. 그땐 어찌나 기뻤던지, 스스로에게 ‘아, 고생했다, 정말.’ 하고 칭찬하고 싶었다. 그렇게 모두의 노력을 갈아 넣은 전략보고서여서인지(정말 ‘갈아 만든 배’가 따로 없었다), 고객도 만족해했고, 나는 마치 졸업을 하는 느낌으로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사실 어렸을 때만 힘든 순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힘든 순간이 찾아왔다.
새롭게 시작한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상사와 잘 맞지 않아 당황했다. 그동안 팀워크를 맞추면서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사람은 없었는데, 회의 때마다 부딪히고 상사(임원)의 의도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정말 열심히 노력을 해도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번번이 그분의 화를 들어야만 했다.
욕을 먹었던 방식은 아주 다양했는데, 내용적인 부분보다 처세나 일하는 방식에 대한 부분이 더 많았다. A 임원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왜 그 회의에서 니가 그 이야기를 했냐. 왜 내가 없는 회의에서 이런 식으로 의사결정을 했냐, (자세히 물어보면) 넌 왜 맨날 물어보냐, 나도 바빠 죽겠는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하냐, 등이었다.
내가 이제 일한 지 10년도 넘었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맞춰오는 방법을 터득해왔고, 그동안 정말 ‘일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또 하나의 난관이었다. ‘사람 때문에 퇴사한다’는 말이 온몸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때의 작은 목표는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여,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상사의 짜증에 너무 많이 동요하지 않는다’였다. 프로젝트는 잘 끝났고, 끝난 뒤 상사와의 면담에서 나는 ‘너는 나랑 잘 맞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고생했다. 잘했다.’라는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 또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임원들로부터도 수고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팀도 바꾸고, 프로젝트도 바뀌고, 상사도 바뀌고 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만난다. 그러다 보면, 위기의 순간들이 온다, 일이 힘들거나, 사람이 힘들거나. 그러고 보면, 이런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잘 버텨서 20년, 30년 일하는 선배들이 새삼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버티는 것’이 전략이고, 지혜이고, 능력이다.
최근 읽은 김이나 작사가의 <보통의 언어들> 책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지금 이 순간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굳이 내가 버텨온 방법을 공유한다면, 첫째는 ‘작은 버티기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면 엄청난 성과를 목표로 잡기는 어렵다. 나의 사례에서도, 당장 매니저한테도 인정받지 못하면서 고객한테 바로 돋보이거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또, 내 상사(임원)가 나에게 맨날 짜증을 내는데, 그것도 못 바꾸면서 전체 프로젝트에서 핵심 인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도 과도한 상상이다.
아주 작은 목표, ’딱 한마디라도 인정의 말을 듣기‘, 또는 ’성실하게 묵묵하게 내 할 일만 한다‘는 것과 같이 내가 할 수 있는 단단한 목표를 잡고 힘든 순간마다 되뇌인다. 작은 목표를 잡으면, 신기하게도 너무 많은 욕심을 내지 않게 된다. 눈 앞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시기를 정해놓고 버티는 것’이다. 첫 번째 사례의 나의 목표는 프로젝트 기간인 3개월이었고, 두 번째 사례의 목표는 1년이었다.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무조건 참아보고, 그래도 아니면 그땐 후회 없이 떠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내가 선택해서 온 직장과 직업이니까, 그 정도는 버텨야 후회가 없을 테니, 최소한의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해놓으면 마법 같은 효과가 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버텨야 하는 시간도 짧아진다. D-30일, D-15일, 하다 보면 정해진 ‘그 날’이 온다. 그러고 나면 아주 신기하게도 처음에 힘들었던 문제가 해결이 되어 있기도 하고, 상황이 조금 변해있기도 한다. 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면, 처음에 결심한 대로 떠나면 된다.
회사생활의 힘든 순간에, 포기하거나 이직하기보단, 버텨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무것도 안 하며 마냥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중심을 잡고, 또 나를 위해 버티는 것이다. 눈이 올 땐 바로 눈을 쓸지 말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던가. 기다림의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싫은 것을 굳이 버틸 필요 있나, 싶은 것이 요즘 생각이지만, 또 기다리고 버티고 하다 보면, 괜찮아진다는 어른들의 지혜도 있다. 그리고 나는, 경험해보니 그 지혜와 현명함을 믿게 되었다.
조용히 내가 할 수 있는 것, 소소한 것에 집중하며 버텨보면, 그 흘러간 시간이 나의 미래에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커버 이미지) 양양의 서피 비치(Surfyy Beach)
"너무 힘들 땐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조금만 더 버티자, 조금만 더' 하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