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다니기 싫지만, 일은 하고 싶어!
모든 직장인의 꿈은 퇴사라던데,
우린 왜 월요일이 밝으면
또 회사로 향하고 있는 걸까.
왜 일을 하는 걸까,
일하는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건, 무엇일까.
한 때 나도 백수를 꿈꿨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고 보니, 생각보다 심심하기도 했다. 회사를 가지 않으니,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점점 적어졌고, 멍하니 누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그땐 집콕 생활에 익숙하지도 않아서, 더욱 말라버린 식물과 같이 생활했다. 아, 다시 쉬면 정말 잘 쉴 수 있는데!)
회사에서 사람들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서로 고민도 이야기하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토론도 하고. 피곤하고 스트레스도 받지만 활력 넘치던 삶이 그리웠다. (물론 지금도 회사 가면 잘 지내지만, 아침마다 출근은 괴롭기만 하다.)
정말 잘 놀고 싶었는데, 왜 난 일을 하지 않고는 심심한 사람인 걸까.
한 때 주변 사람들이 지어준 별명처럼 난 워커홀릭인 걸까.
난 일을 왜 하는 걸까.
일이 좋아서 하는 걸까, ‘해야만 해서’ 하는 걸까.
‘그래도 비교적’ 일하면서 죽기보다 싫다기 보단, 하고 싶어서,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많이 나는데...
언제였더라,
그동안 일하면서 즐겁고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순간은 비교적 최근인데, 바로 이전 직장에서의 기억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늘 기업을 위해 일했던 내가 ‘사회와 소외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고 싶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었고, 주로 일하던 프로젝트의 목적이 ‘회사의 이익 증대나 비용 절감’에서 어느새 ‘개발도상국 국민, 지역 주민들의 행복(삶의 질 증대), 지속 가능한 자립’ 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내 두 번째 직업이었던 국제개발협력(ODA) 컨설턴트는,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국이 OECD에 가입된 선진국이 되면서 개발도상국을 도와주기 위해 GDP의 약 1% 내외의 예산을 편성하고, 이 예산으로 개발도상국에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국민들 교육도 해주는 등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도 6.25 전쟁 후 무려 1990년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원조자금을 받아, 도로도 짓고 건물도 짓고 했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도움을 받다가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고 지금도 전 세계 유일한 케이스다.)
내가 했던 일은, 주로 외교부나 KOICA(코이카, 외교부 산하의 우리나라 무상원조를 총괄하는 공공기관)의 이러한 ODA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평가하는 일이었다. 주로 했던 프로젝트들은, 아프리카 DR콩고에 농업지도센터를 만들어주는 일, 중남미 니카라과에 디지털 교육시스템을 만드는 일, 또 라오스와 우즈베키스탄에 노후화된 직업훈련센터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일 등이었다.
보람이라... 생각했을 때 바로 떠올랐던 기억은 3년 전 겨울, 2주의 출장 기간 동안 미얀마, 스리랑카의 4개 사업지를 돌아야 했던 기억이었다. 한국 외교부와 KOICA가 NGO와 함께 만들어준 미얀마의 직업훈련 학교가 잘 되고 있는지, 또 스리랑카의 음악학교는 잘 운영되고 있는지, 농장지역 보육원은 잘 운영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출장이었다. 2주간 4개 사업지를 돌아야 하는, 너무 시간에 쫓기는 바쁜 출장이었다.
미얀마의 저소득층 청소년들이 제빵, 조리, 커피 등 직업훈련을 받고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업훈련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시간이 너무 빡빡하여 학교를 둘러보고, 교장, 교사들을 인터뷰하기에 바빴던 참이었는데, 삑- 하고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아니, 바빠 죽겠는데 누구지?’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청소년 대여섯 명이 두 손에 가득 빵을 들고 환한 웃음으로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환한 웃음에 바로 업무가 중단되었다. 함께 들어온 미얀마 선생님도 쑥스러워하며 ‘저... 학생들이 좀 전에 직접 드리고 싶다면서 만든 빵이에요.’ 하고 말했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과 미얀마어로 ‘쩨주딘바대 (감사합니다)’를 외치는 목소리 앞에, 사업의 결과와 효과를 측정하겠다며 들고 온 설문지와 핸드폰 녹음기가 새삼 부끄러워질 만큼, 마음의 온도가 따뜻-하게 높아진 순간이었다.
‘이제 식당에 취업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사다 줄 수 있어요.’ ‘언젠가는 내 가게를 가지고 싶어요.’ 아이들은 꿈이 생겼다고 했다. 내가 돈을 낸 것도 아닌데, 꿈을 주어서 한국에 고맙다며 내 손을 움켜쥐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는 아이들의 눈이 빛날 때, 나도 이렇게 일할 수 있어, 이렇게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 내 일에, 내 삶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꿈꾸던 국제개발협력 컨설턴트도 항상 좋지만은 않았다. 출장지는 개발도상국에서도 시골로 들어가야 하는 험지였고, 도로도 잘 닦여있지 않아 이동하는 길 내내 차 안에서 통통 튀느라 허리가 너무 아팠다. 프린터도 전기도 없는 곳엔 회의 자료를 박스 한 가득 인쇄해 낑낑대며 들고 가야 했고, 한 번은 내전이 난 나라에 출장 가서 꼼짝없이 공항 옆 호텔에 갇혀 총소리를 들으며 떨다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인사와, 웃음과, 허그에 나는 늘 깊은 보람을 느꼈다. 막상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은 인터뷰와 논리적인 보고서 작성이어야 했지만, 그러한 ‘보람 모먼트’가 있었기에 ‘이래서 내가 일을 하는 거지! 그래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각자 하고 있는 일마다 ‘보람 모먼트’는 다르다. 식당을 운영하는 친구는 손님이 정말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쉐프가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글을 쓰는 친구는 내 글을 기다리던 독자가 댓글을 써줄 때 기쁘다고 했다. 구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친구는 민원이 죽을 만큼 싫지만, 그래도 민원인의 ‘고맙다’ 한 마디에 다시 힘이 난다고 했고, 건설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완성된 건물을 보면서 아들에게 ‘저거 아빠가 만든 거다’ 할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보람 모먼트'가 없으면, 일을 계속해나가기 힘들다. 일이라는 것은 구할(90%) 이 힘들고, 딱 10% 정도가 '나름 괜찮네, 또는 보람이 있네' 하는 포인트로 구성되어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보람 모먼트'를 찾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언제 회사에서 웃었더라, 어떤 순간에 마음이 따뜻해졌더라,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보람 모먼트'는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지 않아서, 항상 우리는 90%를 차지하는 직장생활의 힘듦과 괴로움에 잡아먹혀버리기 쉽다. 생각이 난 순간이 있다면, 오래 기억날 수 있도록 수첩이나 SNS에 남겨놓아 보자. 그리고 힘든 순간들에 한 번씩 아껴뒀던 보물처럼 꺼내어 보는 거다. 그리고 꼭꼭 맛있게 그 순간을 씹어본다.
나도 인간이니까, '월급 땜에 일하지, 이것이 바로 월급 뽕' 하며 자조적인 목소리를 낼 때도 많다.
그렇지만, 항상 '보람 모먼트'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일하는 이유 (월급이 아닌)가 될 것이다.
다음번엔 경영컨설팅을 하면서 느꼈던 보람의 순간을 모아봐야겠다.
(커버 이미지) 미얀마의 쉐다곤 파고다
"많은 이들의 소원이 모이는 파고다(절)이에요. 미얀마 아이들의 소원도 여기에 모여, 좀 더 나은 삶을 가질 수 있는 데, 제가 도움이 되었을까요?"
** 연관된 글 : 나에게 맞는 일을 찾으라니, 도대체 어떻게?
(부제: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나에게 맞는 직업을 고르는 법)
https://brunch.co.kr/@whynotyoung/46
** 저는 전 직장 회사 동료인 '꿈꾸는 신팀장' 님과 함께 비슷한 질문으로 각자 다른 이야기의 매거진을 펴내고 있어요! 신팀장님의 '나에게 맞는 일 찾는 방법' 편을 참고하려면, 아래를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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