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정글 속에서의 순수
요즘 최애 드라마, 보보경심려.
현재에서 과거로 갑자기 타임슬립한 해수(아이유)가
고려 왕건부터 광종까지를 겪는 이야기다.
아직 끝까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론은 모른다는.
10화까지는 해수와 왕소, 왕욱, 그리고 다른 황자들을 둘러싼
로맨스와 우정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더 어른이 되고 나면,
황위를 놓고 서로를 음해하고 죽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그들의 청년기는 밝고, 설레고, 아름답다.
드라마에서 몇 차례 나왔던
“예전이 좋았다…” 는 황자들의 대사.
내가 좋아하는 초록과 분홍의 색깔이 딱 어울리는,
그들의 웃음과 추억, 애정, 그리고 정의의 감정,
황자들의 그 감정과 시간 나눔이 잊혀지지 않는다.
정말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형제였던, 친구였던, 연인이었던, 그때가 좋았어…
직장 생활을 한지 벌써 11년이 넘었다.
이제는 12년 차가 되어버린 동기들,
동료들을 만난 술자리에선,
“그때 참 좋았지… 재밌었지.”라는 말이
술잔 위를 돌고 또 돈다.
그땐, 우린 일이 많고 힘들었지만,
술 마시고 울기도 하고, 상사 욕도 하고,
택시에 실려가기도 하고,
다음날 술에 쩔어 화장실에서 못 나오기도 했었지.
서로의 연애사는 빠삭하게 알아서,
괜히 서로 참견하기도 하고 핀잔 주기도 하며,
절친함을 아주 과시했었지.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며,
서로의 친구들까지 같이 만나 놀기도 하고.
서로의 가족 이야기도 조심스레 나누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서로만 있으면 된다며,
그렇게 정말 끈끈했지, 우리.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각기 다른 회사로 흩어지고,
누군가는 이사가, 부장이, 팀장이, 그리고 본부장이 되었다.
나도 어언 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임원들의 세계에 가까워갈수록,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라지는 것 같다.
중간 직급인 내 생각 없는(?) 말 한마디는
높으신 임원들의 아주 좋은 소스가 된다는 것을,
몇 해를 겪어내며, 수일을 혼나가며 알게 되었다.
(아니,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는지도 모른다)
내가 업무적으로 했던 말과 단어는,
순식간에 누군가의 자리를 쳐내는 수단이 되고,
누군가를 사지로 밀어 넣는 도구가 되며,
누군가를 한순간에 살려내는
좋은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나와 가까웠던 누군가들도
이제는 정말 높으신 분들이 되어,
나를 활용하려 한다.
활용이 잘 되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린다.
나는 그렇게 쓰임 받기도, 버림받기도 쉬운,
중간직급자다.
(그래서 이때부터 줄 잘 타라고 하나보다)
줄을 잘 탈 것을 고르기에,
회사에서의 ‘줄’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많고,
복잡하게 서로 얽혀있다.
나는 아직은 ‘줄’을 보는 눈이 없고,
‘줄’을 야망 있게 선택할 마음이 없다.
난 다만, 일이 하고 싶어서 조직에 들어온 것뿐인데…
그런 나에게 줄타기를 강요하는 조직은,
가혹하다.
사실 내가 줄을 타지 않아도,
내 행동 하나하나가 줄타기로 해석되니,
난 이미 어느 곳엔가 올라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보경심려에서 황자들이
서로의 편을 복잡하게 가르고,
손을 잡았다가 배신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 죽임을 당하기도,
살아남기도 하는 것은,
직장의 사내정치와 똑 닮았다 싶었다.
순수하고 싶고, 사람이고 싶었던 해수는
누군가들의 예쁨을 받았지만,
또 누군가들의 미움을 받아 무참히 밟힌다.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다.
회사 내에서 임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말 낮은 직급도 아니고,
뭘 해도 임원들의 눈에 띄고
그들의 이해관계 사이에 놓이는 나는,
해수와 그렇게, 똑 닮았다.
나만큼은 사내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고,
그저 일을 하며 나아가고 싶었지만,
현실의 직장은 나를 그저 그렇게 두지 않는다.
“누구 편이냐”는 말에 정말이지 신물이 난다.
직장에서 윗분들의 “내 사람”이라는 표현이
정말 ‘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었음을 왜 몰랐을까.
궁에 있기 못내 힘들었던 해수처럼,
나는 아직, 사내정치 흐름에,
굳건히 버티기가 어렵다.
이대로 있다가 나도 또다시 해수처럼
궁 밖으로 도망쳐버릴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나는, 순수를 택하고 싶다.
뭘 해도 회색빛이 짙은 요즘 회사생활이지만,
예전이 그립다,
초록 초록했던 그때가.
그렇게 서로 이해관계없이 우정을 나누던 그때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줘도 되었던 그때가.
술 한잔이면 모든 서운함이 다 풀렸던 그때가.
(커버 이미지 : 스페인 론다(Ronda), 누에보다리(Puente Nuevo), 협곡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다리.
위태해보이는 다리지만, 역사와 함께 이어져오듯, 우리의 직장 생활도 위태위태 아슬아슬하면서도 나에 의해, 또 누군가들에 의해 계속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