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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토끼 Oct 15. 2019

회사를 다녀서 화가 났던 건 아니었다

퇴사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지난 직장은 매일이 많은 사람들과 협력해야 했고, 나는 또 그들을 관리하고, 그들이 잘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팀장의 역할이었기에 스트레스가 많이 심했다. 특히 고위급 대학 교수들과 많은 일을 했었는데, 나의 팀장 역할은 하는 일에 비해 빛이 난다기보다 그분들을 빛나게 해 주어야 하는 일이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보다는 더욱 욕구불만으로 쌓여갔다. 하루하루가 힘이 들고 출근이 싫어지자, 정신의 문제는 몸으로 나타났고, 더 이상 일을 지속할 수 없어서 그만두었다. 


  멋지게 말하면, 시원하게, 퇴사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대책 없이 일단 그냥 회사에서 나왔다.   


  그래, 조금만 쉬다가 다른 일을 찾자. 

  회사를 다니면 정신이 맑아지며 몸도 마음도 휴식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휴직하기 잘했다, 퇴사하기 잘했다, 정말 자유롭고 행복하다, 는 많은 포스팅들을 봤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머리가 더 멍해지고, 무기력해져 갔다. 


  퇴사해서 아침에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었고, 직장 동료들의 감정 결을 살피느라 나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하루가 훅 가지 않아도 되었고, 퇴근 후 하품하며 또다시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잠들 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날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은 정말 좋다. 


  그렇지만, 시간이 생기니,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 매우 깊어진다. 내 경우에는, 그간 10년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며, 내 성격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자, 끝이 없고 답 없는 모호한 생각들이 확장되었고, 머리가 아파져 왔다. 나도 참 성격 지랄 맞네,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난 결국, 혼자서는 도저히 머리가 아파, 상담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씩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싫어했던 다른 사람의 그 행동은 내 과거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었고, 또 내가 좋아하는 순간은 어떤 분위기인지 등에 대해 3시간 반에 걸쳐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가부장적인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모습. 그렇지만 그 구조 안에서 그것을 잘 이용(?)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 꿈을 키워왔던 나의 모습. 그러면서도 늘 그 구조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 외로움, 짜증, 그리고 화... 또 그 구조를 엎어버릴 수도 없어 좌절했던 순간들. 그러한 구조 속에서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나 역시 그 프레임에 갇혀 누군가를 ‘관리’하고 상처 주었을 수 있었던 순간들.       


  정말 인정하기 싫었던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대화가 필요했고, 그러나 긴 삼십사 년 간의 인생을 곱씹기에는 3시간 반이라는,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짧지만, 아픈 시간이었다. 몸살 걸린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했고, 결국 집에 돌아와서 침대 속으로 직행해야만 했다.  


 ‘어쩌면 상대를 모르는 것보다 나를 모르는 게 더 파괴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나한테서 나를 감춰버렸다는 게, 그건 정말 어디를 들춰봐야 할지를 모른다는 거잖아... 감춰진 나를 스스로 본다는 게 좀, 어쩐지 좀, 아파.’  - 드라마 <멜로가 체질>


  회사를 나오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없어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진부하지만, 많은 인생 선배들이 얘기하시는 것처럼,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는 회사를 다녀서 화가 났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회사를 다니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회 속에 있었기에, 나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최근엔 브런치에서 나와 같은 상황, 퇴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게 되었다. 대부분 잘 지내고 계신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또 외로워졌었다. 왜 퇴사해보니 막상 별 건 없었다, 는 이야기는 없을까. 


  퇴사하면, 별 건 없다. 퇴사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간의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정말 충분히 주어진다는 것이 좋고, 그 과정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만, 퇴사하지 않았다면 온전히는 얻을 수 없었던 시간인 것은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퇴사를 응원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고민의 시간이 끝난 것은 아니겠지만, 조금은, 나의 취약성과 모순성을 인정하고,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므로, 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늘 에프엑스 설리의 자살 뉴스가 뜨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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