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종속영양생물종이 기후불안에 대응하는 자세
자연은 자립적인 자원 순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독립영양생물인 나무는 물, 햇빛, 이산화탄소를 약간만 가지고도 제 자신은 물론이고 만물까지 먹여살린다. 죽은 가지에 남은 영양 찌꺼기는 토양의 양분이 되어 후손을 생장하게 한다. 그게 우리 지구를 장식하는 푸른 주인들의 순환 원리라고 숲 덕후가 말했다. 수분도 햇빛이 인도하는 대로 바다가 되었다가 빗물이 되었다가 한다. 산은 불타서 비옥해진다. 어떤 구성원도 욕심내지 않으니 시스템은 영원히 견고할 수 있었다. 종속영양생물 한 종이 발작하기 전에는 말이다.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려고 발악을 떨었다. 사랑에 미쳤고, 고통에 민감해서다.
지구는 그 어떤 시대에도 생물에게 마냥 아늑한 환경을 제공하진 않았을 것이다. 환경은 그저 주어졌고 우리는 그냥 태어났다. 맹수의 이빨이 번뜩이고 세균의 침략이 빈번한 곳에서 말이다. 무리 지어야 살 수 있는 인간은 동료를 무수히 잃었다. 때로는 무리 중 폭력적인 개체한테 살인 당했으며 대부분은 춥고 굶주려서 세상을 버렸다. 결국엔 일상적인 고통이 견디기 힘들어 유목 생활을 끝냈다. 그리고 문명을 꾸렸다. 숲이 침범할 수 없는 경계선을 넓혀가면서.
인간이 자원을 급하게 빨아들인 탓에 순환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
한때 인간은 자연을 경배했다. 하지만 제압될 조짐이 보이자마자 한순간에 시건방져졌다. 몸집을 불린 문명과 붙기에는 자연은 너무 순종적이었다. 기세등등한 인간은 잃은 동료의 수만큼 빨대를 꽂았다. 다시 말하지만 지구는 마냥 친절하지 않다. 욕심쟁이 개체 대신에 미약한 개체부터 참수시키려 들었다. 그런 다음 이 눈꼴 시린 먼지들을 싹 치워내려고 할 거다. 왜 그랬는지 들어보지도 않고, 충성스러운 신자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지 않고.
이건 다 인류가 독립영양생물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숲에게 배워서 약간의 친환경적 에너지만 가지고도 자립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 그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을 텐데. 자연과 대립할 거면 의존하지도 말아야 했다. 이웃집에 수풀이 입주하는 게 영 꺼림칙하다면, 인간의 군집 사회가 개별적인 순환 시스템을 마련하면 된다. 어떻게 하냐고? 모른다. 가능하겠냐고? 못할 건 뭐 있냐. 이미 늦지 않았냐고? 희망은 선착순이 아니다.
나무가 태양을 경배하듯 나는 진리를 경배한다.
절대적이고 종합적인 정답이 있으리라 믿는다. 오만하게 그 정체를 확신하려 들진 않겠다. 해바라기는 몸체가 연약하여 태양에게 열 발자국만 다가가도 화상을 입는다. 나는 주관이 짧고 한정적이기에 전체를 규명하려다간 평생이 불타거나 머리가 폭발할지 모른다. 진리의 테두리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만족한다. 오직 한편의 견해만 믿으며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힘을 겨룰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정답은, 우리가 갸륵해서 한결 가까이 와준다.
그리고 그런 내가 믿는 진실 중 하나는 인류가 발전할 운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인류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은가? 구멍난 시간을 땜빵질 하려고 오락거리를 발명했고 역신을 흠씬 두들겨패려고 백신을 만들었다. 신분제가 입에 풀칠도 못하게 막아서 인권을 발굴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꼬박꼬박 배터리를 갈아서 배꼽시계를 재운다. 지금도 숱한 사해동포가 바글바글 득시글거리는 고통을 때려눕히려고 저마다 싸우고 있다. 그러니 유일무이하게 반항했던 종속영양생물종답게 희망을 가져보자. 손해볼 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