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를 저술한 이국환 작가는 ‘애도, 슬픔을 기록하는 슬픔’ 챕터에서 진정한 애도란 사랑하는 대상을 기억하고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떠한 족적이든 남겨지고 싶어 몸을 벌벌 떠는 놈이기 때문에 망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나 비통해야만 하는 이유는 납득하지 않았었다. 슬픔이 하찮아지면 안되는가? 그것이 윤리적이기 때문인가? 찾아온 슬픔은 묵게 해주되 오지 않은 슬픔까지 구태여 환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남은 자들은 자신의 근원 같은 곳에 묘지를 세우고, 깔끔하게 슬퍼하고 망각하다가, 가끔 가서 핏기 없는 꽃을 바치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본디 가녀린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어떤 작별만은 적당히 슬퍼하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이 윤리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라는 개체와 관계를 맺는 무수한 대상, 그 중에서 중추가 되는 것은 이미 내 영혼까지 깊이 침식해있는 까닭이다. 나는 그의 시간을 빼앗았고 그는 나에게 시간을 벌어주길 바랬다. 내게 고질적인 무게를 얹어주어서 참을 수 없이 가볍던 내 목숨값이 다른 애들만큼이나 비싸졌다. 낡은 그는 가장 무거웠기에 다른 장난은 모두 기가 죽었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울었고 그는 구슬피 울었다. 이리하여 그를 빼놓고 내 존재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유일하게 암송할 수 있는 향가 <제망매가>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으 미타찰에 맛 보올내 도 닷가 기드리고다. 먼저 보낸 상대와는 내 수명이 다한 날 미타찰(극락)에서 만나게 될 테니 도 닦으며 기다리겠단 말이다. 작별이 두려운 이유는 더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리 톨마운틴의 시 <우리에게는 작별의 말이 없다>에선 ‘돌아오지 않으면 /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거야.’라는 구절이 있다. 언젠가 또 만난다고 열정으로 믿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나 때문에 수고가 많았고 다음 생에도 즣은 인연으로 만나달라고 말해줄 것이다. 종교를 믿는다면 이런 점은 위안이 된다.
만약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불합리하게 잃은 경우라면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김용균법, 민식이법이 그 사례다. 똑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유가족이 분투하여 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똑같이 죽었을 누군가가 살아남을수록 상대가 차츰 재생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동병상련으로 연대하고 사회와 함께 애도한다. 허망하게 잃어야 했던 무력감과 죄책감이, 다른 너를 살리는 것으로 회복된다. 우리가 될 뻔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되지 않으면서 나는 저들을 우리로 상상할 수 있다.
대체로 상실은 갑자기 온다. 나는 갑니다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야속한 임은 언질도 없이 그냥 간다. 사랑한다고 말 못 하고 더 잘해주지 못해서 애석하다. 못 해준 것만 생각나고 속 썩인 것만 떠오른다. 상대도 못 해준 게 있는데 후회는 오로지 내 몫인 것 같다. 그러나 기억하자. 떠난 자는 묵은 체증을 비우고 간다. 우리가 빈자리를 느꼈듯이 상대도 자리를 비우면서 옆구리가 쓸쓸했다. 저승으로 가면서 망자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 내가 정말, 좋은 사람과 함께 했었노라고. 그래도 역시 미안하긴 하니까 저승에 가서 사과하고 내년 생에 곱절로 잘해주면 된다. 내가 좋아하는 <화등>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의 이불자락을 소롯이 덮어 주고 화등 하나 챙겨 들고 미움만 떠납니다.
물론 살아생전이 제일 기회가 많으므로 마땅히 잘해야 한다. 계속해서 다짐한다. 엄마가 자서전 내도록 할 것. 착하고 약한 사람한테는 적당히 봐줄 것. 개별 개체한테 까칠하게 굴더라도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도록 노력할 것. 새 둥지를 틔우고 번영하다가, 가끔 돌아오게 될 우리 형제들 얘기도 잘 들어줘야겠고, 그리고 소풍 같은 인생 너무 괴롭지 말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치 부끄럼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