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아빠와 멀어지는 과정

엄마의 가스라이팅

by 양독자



어렴풋한 감정이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다. 이런 직접적인 고백은 엄마가 서운해하려나? 살짝 돌려 말하자면, 나는 유독 아빠와 죽이 잘 맞았다. 생물학적으로 자식은 부모의 한쪽을 더 닮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그게 아빠였던 것 같다.



아빠와 있을 때는 묘한 안도감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단순히 그가 나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다.(사실 그 이유도 있긴 하다)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만날 때 느껴지는, 일종의 ‘동족 안정감’이랄까? 나는 아빠의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성격도 판박이 었다.



문제는 내가 아빠의 별로인 부분까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 점을 매우 못마땅해했다. 그래서일까? 간혹 아빠의 잘못은 나에게 투영되었고, 그녀의 불똥은 나에게 튀었다. 그럴 때 나는 합당하지 않은 사유로 혼을 내는 엄마를 비난하기보다, 나를 혼나게 만든 아빠를 원망했다.




”너네 아빠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어려워진 집안 형편을 곱씹을 때면 엄마는 늘 아빠를 ‘너네 아빠’라고 불렀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나의 아빠’지 ‘엄마의 아빠’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가 매몰차게 선을 그을 때면, 내 심장은 스크래치가 생긴 것처럼 따가웠다. 나의 아빠를 욕하는 사람이 나의 엄마라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대체 뭐지?



엄마는 누구에게도 아빠의 험담을 하지 못했다. 엄마의 엄마에게 말했다간 외할머니가 속상해할게 뻔했다. 그렇다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녀의 답답함을 풀어놓을 상대는 결국 나뿐이었다. 엄마는 누워서 침을 뱉는 대신 자식에게 가래를 뱉은 셈이다.



차라리 ‘너네 아빠’가 아닌 ‘내 남편’이라고 부르며 뒷담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내 마음이 이 정도로 상하진 않았을 텐데. 나는 내가 아빠의 팬이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엄마의 주입식 교육을 흡수하고 있었다.

‘아빠 때문에 우리 집이 망한 거야’

‘아빠 때문에 내 유년 시절도 엉망이 된 거야’

어느덧 나는 응용 학습까지 해내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아빠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티보다 무서운 게 ‘돌아선 팬’이다. 아빠를 향한 엄마의 한탄에 마지못해 맞장구를 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보다 더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작은 공감과 위로만 얻으려던 그녀의 목적이 변질된 결과를 낳은 셈이다. 이제 나는 누가 불을 지피지 않아도 스스로 아빠를 미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춘기가 되자 강도는 더 심해졌다. 예수님과 부처님도 막지 못한다는 중2가 될 즈음, 나는 아빠를 다른 아빠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친구가, 나보다 좋은 옷을 입고, 나보다 좋은 집에 살고, 나보다 용돈도 많이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보가 고약해졌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실감 났다.



간혹 내가 지독하게 ‘나의 아빠’를 욕하며 흑화 하면, 놀란 엄마는 곧장 나를 하얗게 되돌리려 노력했다. ‘그래도 아빠는 다정한 사람이야’라며 나를 토닥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나에게는 아빠를 부정하는 자아가 생겨버렸다.




쌀쌀한 기운이 한층 사그라든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가 공원을 구경하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 녀석… 또 학원에 가기 싫은 모양이다. 어차피 집에 가면 혼자 있어야 하는 나는 기꺼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푸릇한 공원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눈에 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아빠였다. 밤근무를 하는 순번에는 오후 느지막이 출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필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왜 하필 친구랑 있을 때, 하필 대낮에, 하필 공원에서. 하필이면…



후줄근한 점퍼를 입고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아빠를 못 본 척했다. 내가 그에게 손을 흔들면 쏟아질 질문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너네 아빠 셔? 너네 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 시간에 여기 계셔? 너네 아빠는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셔? 나는 저 사람을 ‘우리 아빠’라고 소개할 용기가 없었다. 엄마가 욕하던 ‘너네 아빠’를 감쌀 용기가 없었던 것처럼.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레이지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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