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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Jul 28. 2024

맞벌이 부부의 외동이 크는 법

혼자 남겨진 순간들


7살이 되던 해 가을. 나는 유치원에서 졸업 학예회를 준비 중이었다. 동요에 맞춰 즐겁게 움직이던 율동과 달리, 집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변하고 있었다. 아빠가 직장 동료에게 서준 보증이 문제였다. 엄마 말에 따르면 우리 집에 빨간색 딱지가 붙었다고 했다. 원래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는데, 이젠 조금의 여유마저 증발해 버렸다.


급하게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살던 집에 세를 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외조부모님 댁이 있는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내막을 모르는 친구들은 서울에 가는 거냐며 부러워했다(당시 경상도 아이들은 서울과 인천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공식적 이별 행사인 졸업식에는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이른 헤어짐을 맞이했다.


사는 곳이 바뀌자 다른 것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외동의 특권이었던 ‘혼자 쓰던 내 방’이 사라졌다. 아빠는 새 직장을 구했고,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라는 외동딸이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학생보다 학부모가 더 바쁘다고 한다. 실제로 이것저것 챙겨줄 것도 많고 학교에 참석할 일도 잦다. 오죽하면 회사에 초등학교 입학기 자녀의 부모를 위한 휴직제도가 있을까.


우리 엄마도 학교에 온 적이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과 1학년 참관수업 정도? 그 뒤로는 오지 않았다. 아니, 오지 못했다. 엄마는 그 시절 흔치 않은 워킹맘이었다.


참관수업 날이 되면 곱게 단장한 엄마부대가 우르르 몰려온다. 글쎄 요즘 아이들은 엄마에게 예쁘게 하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한 단다. 교실 뒤에 선 엄마의 존재는 아이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다. 예나 지금이나.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교실 뒤로 쪼르르 달려간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집에서 본 엄마일 텐데. 반가움의 정도가 이산가족상봉 급이다. 덕분에 교실 안이 시끄러워 정신이 없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여길 벗어나야겠다. 그런데 한 친구의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이따가 오빠 수업 듣는 것도 보고 올게”


곧이어 다른 학년의 수업이 시작되나 보다. 만약 학교에 나 말고 다른 자식도 있었다면… 엄마는 여기에 오기 위해 좀 더 애를 썼을까? 철없는 생각이 스쳐간다.




요즘은 학교 운동회를 주말에 한다고 들었다(누군가에게는 주말 근무라는 게 아이러니다). 그랬으면 나도 부모님과 소풍 같은 하루를 보냈을까? 아쉽지만 우리 가족이 평일에 함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작 세 식구인데도.


엄마가 오시거나 아빠가 오시거나, 그 마저도 안되면 할머니가 와주셨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보다는 엄마가 왔으면 했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와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속내를 드러내진 못했다. 엄마는 지쳐 보였고, 나는 눈치가 보였다. 이따금씩 들었던 ‘너까지 엄마 힘들게 하지 마’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딱 한 번, 아무도 오지 않은 운동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었나. 아마 부모님 모두 시간 내기가 어려웠나 보다. 결국 엄마는 내 친구네 집에 나를 부탁했다. 딸의 친구 엄마에게 자신의 딸을 부탁하는 엄마. 그때 엄마는 많이 속상했을까?


달리기를 끝내고 밥 먹는 시간이 되었다. 약속대로 나는 친구네 돗자리에 합석했다. 그곳에는 친구네 엄마, 친구네 오빠, 친구네 김밥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여서 재밌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축되는 마음이 들었다. 돗자리 아래 뾰족한 돌멩이라도 있는 건지. 좀처럼 편히 앉기가 어려웠다.


만약 나에게 형제가 있었어도 부모님은 오지 않았을까? 한 명이니까 남에게 부탁하기가 수월했나? 우리 딸은 의젓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넓은 운동장을 채운 수많은 아이들 중 나만 혼자인 것 같다. 가족과 함께했던 감사한 날보다 아무도 없었던 그때의 순간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제 와서 뒤늦은 위로를 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저녁 6시가 지나서야 일을 마치고 집에 왔다. 직장인의 역할은 끝났지만 그때부터 학부모의 업무가 시작된다. 퇴근 후에 대리를 뛰거나 배달일을 하는 사람만 대단한 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워킹맘은 위대하다.


먼저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 나는 엄마에게 학교에서 적어온 안내장을 펼쳐 보인다. 문방구에서 사야 하는 물건이 있으면 난감하다.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숙제도 확인해야 한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미생 중의 미생. 혼자서 손도 못 대는 과제가 많다. 초등학교 저학년 숙제는 엄마 몫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누구보다 빠르게 습득해야 했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했다. 엄마의 한숨과 짜증을 최소화하려면. ‘이것도 안 하고 뭐 했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엄마가 빨리 집으로 오길 바라면서도 엄마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혼자 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부모님은 내가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느낌이었다. 큰 양식장에 방생된 물고기 같달까. 물론 지금은 알고 있다. 부모님은 나를 방치한 게 아니라 방생했다는 것을. 하지만 당시에는 둘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벼슬보다 더하다는 고3 시절, 대학 진학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유난 떠는 부모를 바란 건 아니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부모도 그다지 좋진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학원을 어디로 다니고, 과외를 얼마나 하는지 알기나 할까. 입시에 필요한 3대 요소가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는데. 나에게는 무관심만 남은 것 같았다. 아! 한 가지라도 있으니 다행인가?




초등학교 졸업식, 그날은 최고의 하루였다. 부모님이 모두 학교에 와주셨기 때문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주말에도 일하는 아빠와 주말에만 쉬는 엄마가 함께 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아마도 한 분 혹은 두 분 모두 일부러 시간을 내주셨겠지. 졸업식이면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려면 어느 정도 삶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날이 더 행복했다. 내가 흔하게 누릴 수 있는 당연함이 아니라서.


우리 세 식구가 완전체로 모인 순간은 다리가 펼쳐진 튼튼한 삼각대 같았다. 흔들림 없이 단단하고 든든했다. 그날 아빠가 가져온 필름 카메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왼쪽에는 아빠, 오른쪽에는 엄마, 그 사이에는 내가 서있었다. 한 손에는 졸업장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엄마가 고심해서 골라준 장미 꽃다발을 들었다. 나는 그 사진이 참 좋다. 오동통해서 터질 듯한 내 볼때기만 빼고.


그 뒤로 우리가 다 같이 참여한 학교 행사는 없다. 대학교 졸업식도 혼자서 다녀왔다. 당시 신규직원 교육을 받는 중이었고, 졸업식이 끝나면 곧바로 연수원으로 복귀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부모님께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밥은 친구들끼리 먹으면 된다고 했다. 엄마는 정말 괜찮겠냐며 미안해했다.


막상 학교에 도착하니 혼자 온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내 친구는 부모님, 오빠, 동생까지 온 가족이 총출동을 했다. 내가 그들을 보고 놀란만큼 그들도 혼자인 나를 보고 당황해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초반의 당당함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난 이제 어른이야! 이런 상황은 자주 겪어봐서 괜찮아! 주눅 들지 않기로 했다. 몸이 함께하는 게 중요한가? 마음으로 더한 축하를 받았으니 상관없었다. 내성이 생긴 걸까, 내공이 생긴 걸까. 점점 혼자인 순간들이 몸에 익어갔다(부모님께 학사모를 씌워드린 사진이 없는 건 좀 아쉽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드물던 시절. 여자는 결혼 후에 일을 그만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까지 하는 엄마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엄마이거나,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엄마이거나. 우리 엄마는 후자였다. 어쩔 수 없이 워킹맘의 외동딸이 되었다. 그 시절, 맞벌이 부부 밑에서 자라는 외동아이는 혼자 감당하는 시간이 넘쳐흘렀다.


몇 해 전부터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삶으로 돌아갔다. 살림과 일을 병행한 지 꼬박 22년 만이다. 엄마는 못다 한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은지 다 큰 딸에게 관심이 상당하다. 꼬박꼬박 밑반찬과 음식을 챙겨주고, 자취방에 올 때는 설거지라도 해주려고 고무장갑부터 찾는다.


이제는 뭐든 혼자서 하는 게 익숙하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어색하다 못해 억울한가 보다. 가끔은 철부지같이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그렇게 틱틱거리면 혼자 보낸 시간이 조금은 채워지기라도 하나? 일찍부터 철이 든 줄 알았는데 아직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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